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사덕 (문단 편집) === 2000년 이후 === [[파일:홍사덕.jpg]]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지역주의와 1인 보스정치 타파를 기치로 내걸며 새정치를 표방해, 여전히 [[삼김시대]]의 그림자가 짙게 남아있던 당시 정계에서 신선함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당시만 해도 상대적으로 젊고 스마트한 이미지에 강남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직을 따낼만큼의 파워도 있었던 홍사덕의 새정치 표방은 국민들의 많은 기대를 받았고, [[장기표]]와 함께 [[https://www.hani.co.kr/arti/legacy/legacy_general/L217899.html|무지개연합이라는 신당 창당을 본격 추진]]하면서 기대치가 절정에 올랐었는데 그 시점에서 [[한나라당]]에 입당해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이는 대한민국 정치 역사상 손꼽히는 [[변절]] 내지 [[통수]]로 두고두고 회자되는데,[[http://legacy.h21.hani.co.kr/h21/data/L000131/1p9p1v2s.html|#]] [[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83062|#홍사덕 창당 선언 '작심 1주일']] 해당 기사에서 인용된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나라당에 가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도대체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던 사람이 이래서야 되겠느냐"라는 기자의 항의성 질문이 당시 정확한 세간의 평가였다. 헌데 훗날 [[http://news.donga.com/List/Series_70000000000578/3/70000000000578/20140704/64959120/1|권노갑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통일부]] 장관을 맡고 싶다면서 [[새천년민주당]] 쪽과도 접촉했었다고 한다. 이후 지역구는 [[오세훈]]에게 넘기고 자신은 [[비례대표]] 2번을 배정받아 제1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국회부의장]]으로 재임했다. 2001년 부의장직을 사임하고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나섰다. 그러나 2002년 3월 7일자 [[중앙일보]]의 대의원 조사에서 지지율이 36.5%으로 53.1%인 [[이명박]]에게 크게 뒤처지는 결과가 나오면서 경선을 포기했다. 당시 "이명박이 당내 경선에서 대의원들을 상대로 지나치게 '물량' 공세를 펴는 것에 홍사덕이 크게 분노했다"는 얘기가 돌았고, 홍사덕은 기자회견을 열어 "이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서울시장 선거에서 반드시 보여 주겠다"며 무소속 출마를 시사했으나 지도부의 만류로 무소속 출마는 실행되지 않았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98901?sid=100|#]] 2003년 한나라당 원내총무(지금의 [[원내대표]])에 선출되어,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54478|이라크 파병하면 한달 동안 사병으로 근무하겠다]]는 주장을 했다. 당시 파병 결정에 미온적이었던 [[참여정부]]를 겨냥한 언사였고 심지어 재입대를 하겠다며 입대 자원서를 제출했으나 병무청 측에선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안된다'며 이를 거부했다. 당시 그의 주장에 찬반 논란으로 들끓었는데 ‘홍사덕 이라크 파병 운동본부’가 생겨났고 '10만 명 서명운동'과 '홍사덕 이라크행 비행기 값 모금운동'까지 벌어질 정도였다. 그러나 17대 총선에서 낙선하면서 이라크 복무 얘기도 유야무야됐다. 본인은 이에 대해 아무 언급이나 사과없이 침묵하다가 2년 후에야 [[평화방송]]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해명을 했다.[[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69359.html#csidx1125812160af3c09e408d835ce24372|#]] 2004년에는 한나라당 원내총무로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노무현 탄핵 소추]]를 주도하고 그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갑(현 [[일산동구]]) 지역구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열린우리당]] [[한명숙]]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5년 재보궐선거]]에서 경기도 [[광주시]] 지역구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탈락하였다. 이에 불복하고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정진섭(정치인)|정진섭]]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는 [[박근혜]]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고 이때부터 본격 [[친박]]이 되었다. 홍사덕 선대위원장은 "지금까지 드러난 의혹만 해도 17가지다"면서 [[이명박]]을 대선 후보로 선출할 경우, 이후 대선 본선 과정에서 후보 자격을 상실하게 되면 한나라당이 후보도 내지 못한 채 대선을 치를 수 있다면서 박근혜 후보 지지를 호소했다. 또한 이명박 측의 [[한반도 대운하]] 공약에 대해서 악몽이라고 비판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1728621?sid=100|#]][[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0201763?sid=100|#]]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친이]]계가 주도권을 쥔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하여 [[미래희망연대|친박연대]] 후보로 [[대구광역시]] [[서구(대구 선거구)|서구]] 지역구에 출마, 당선된 후 [[한나라당]]에 복당하였다. 언론 인터뷰에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입장이 바뀐 이유에 대해 "달라진 계기는 ‘박 대통령은 성공했기 때문에 죽음을 맞았다’는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의 말이었다. 거의 감전된 것 같은 느낌이 왔다. 박 대통령은 끼니를 거르던 나라를 산업화시켰다. 두꺼운 중산층이 생겼고, 그 중산층의 민주화 욕구가 부마사태 등을 불러온 것이다. 80년대 이후에는 일관되게 박 대통령을 높이 평가했다."고 말했다. [[https://m.khan.co.kr/article/201107102155355|<이상돈·김호기의 대화>(21) 친박계 좌장 홍사덕 의원]] 2008년 한미FTA 비준을 두고 나라가 극심한 정치적 갈등을 겪고 있을때 "민주당에 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이번 회기 내에 처리해야 하는가를 놓고 끝까지 가는 토론을 요청해야 한다"면서 "엄중한 시기에 있음을 국민에게 알려주고 여론의 뒷받침을 받아야 국회에서 FTA 비준동의안 처리도 가능하다"며 "의석수로 밀어붙이는 것은 정말 위험천만하다"고 주장했다. 또 "대야기조도 바꿔야 한다"며 "여러 부분에서 야당과 대화하며 협력을 구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안팎으로 어려울 때 대북관계가 긴장 관계에 빠지는 것은 정말 피해야 한다"며 "생존을 위해서 당이 주도적으로 앞장서서 대북 기조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08/0002059787?sid=100|#]] 2010년 [[연평도 포격전]] 이후에는 "지금과 같은 남북관계는 장기적으로 지속되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모두 생각할 것"이라며 "당 대표, 원내대표께서 신임 정책위의장과 상의해 대북 관계 정책을 선도적으로 리뷰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 어떤가 한다"고 제안하며 [[남경필]], [[정두언]], [[정몽준]]과 함께 정부 대북정책의 기조 변화를 요구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02/0001968224?sid=102|#]] 2011년 10월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한 것에 대해 "엠비(MB) 심판론이 먹힌 것은 시대정신을 담지 못한데서 비롯됐다고 본다”면서 "일본 자민당이 55년간 장기집권했던 것은 사회당과 민사당이 좋은 정책이나 아이디어를 낼 때마다 재빨리 구체화해서 실천했던 덕분이다. 영국 보수당도 마찬가지였다"며 경제, 고용, 대북문제 등에 대해 당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117270?sid=100|#]]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선거구에 [[전략공천]]을 받아[* 홍사덕 외에 [[이동관]], [[조윤선]] 등이 공천을 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들은 야당 중진인 [[정세균]]을 상대할 수 있는 정도의 체급이 아니었다.]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민주통합당]] 정세균 후보에 패하여 낙선하였다. 2013년 [[정치자금법|정치자금법위반죄]]로 벌금 300만 원과 추징금 3,000만 원을 선고받았다. 2012년 8월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출 100억 달러를 넘기기 위해 [[10월 유신|유신]]을 한 것"이라며 "유신이 없었으면 우리나라는 수출 100억달러를 못 넘었을 것", "우리나라가 와이셔츠와 가발을 만들고 쥐와 다람쥐까지 잡아 팔아서 1971년까지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했지만, 100억 달러는 중화학공업 육성없이는 불가능했다. 야당 등에서 유신을 얘기할 때 안 좋은 부분만 얘기하고 좋은 부분은 빼는데 이는 참 비열한 짓"이라고 발언했다가 [[위 아 더 월드|여야를 막론하고]] 거센 비난을 받았다.[[https://pressian.com/pages/articles/21206|#]][[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05786858?sid=10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