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봉한 (문단 편집) == 여담 == * [[사도세자]] 문제에 있어서는 반대파들에게 사도세자의 비행을 은폐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한중록]]》에서 [[혜경궁 홍씨]]는 충절의 결과이자 사도세자를 [[영조]]의 진노로부터 보호하고자 어쩔 수 없이 의리와 실리의 우선 순위를 뒤바꾼 결과라고 [[변호]]한다. 물론 혜경궁 홍씨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버지이니만큼 본인의 주관을 담아 옹호한 측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홍봉한이 자신의 사위 사도세자를 보호하는데 가장 앞장선 인물 중 하나라는 점은 확실하다. 특히 사도세자가 홍봉한에게 자신의 정신 질환에 대해 토로하며 이에 대한 [[약]]을 구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어서 사도세자 역시 장인인 홍봉한에게 꽤나 의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편지는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사도세자의 입지가 불안해지면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 입장에서도 좋을 것이 전혀 없으며 오히려 홍봉한은 사태가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비행을 철저하게 함구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래서 혜경궁 홍씨의 언급대로 홍봉한은 사도세자에 대해서 할만큼 했다고 봐도 되는 것. 하지만 사도세자는 [[궁궐]] 내에서 [[살인]], [[강간]]을 저지르는 심각한 [[범죄]] 행각이 드러난 상황이였으며 급기야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마저 영조에게 세자의 비행을 폭로한터라 홍봉한도 더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특히 반 홍봉한파인 한유가 이에 대해 비판했다가 오히려 영조의 심기를 건드리는 바람에 처형당한 것만 봐도 홍봉한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방관한 것은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 영조에게서 살기 위해서 한 것일 뿐 결코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는걸 알 수 있다. 이러한 [[골육상쟁]]의 간접적인 피해자인 정조도 외조부의 행동을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 외가에 대해서는 모질게 굴지 못했다. 특히 정조는 "홍인한을 사사하라"는 대간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친모인 혜경궁 홍씨에게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물어보며 외조부의 형제에 대한 처분을 망설였다. 이에 혜경궁 홍씨는 "본인의 숙부라도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게 당연지사"라고 했고 정조는 어머니의 뜻을 받아들여 홍인한을 사사시킨다. 이것도 정조가 친모를 옹호하기 위해 과장해서 한 말이었는지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이 사실을 부인했다. * 정조 입장에서는 외할아버지가 아버지의 비참한 [[최후]]를 방관한게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임오화변]]이라는 [[역대급]] 사태에서 홍봉한도 사위인 사도세자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국왕]]이자 사돈인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이려고 결심하였고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폭력으로 나왔는데 섣불리 사도세자를 옹호했다가는 사사된 [[효순왕후|현빈 조씨]]의 오빠인 조재호처럼 될 수 있었고 애초에 조재호의 사사에 앞장선 사람이 바로 홍봉한이였다. 만약 [[소론]]의 핵심 인물인 조재호가 사도세자를 구하는데 성공하여 나중에 사도세자가 보위에 오르면 [[나주 괘서 사건]]으로 입지가 좁아지다 못해 역당으로 [[낙인]]찍힌 소론은 사도세자를 구한 공으로 재기할 위험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노론의 수장인 홍봉한의 입지도 좁아지기 때문에 조재호 제거에 앞장섰던 것이다. 또다른 견해로는 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조재호를 제거했다는 견해도 있다. 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면 정조의 외척은 홍봉한에서 조재호로 옮겨가며 [[권력]]이 이동할 염려도 있었다. 딸인 혜경궁 홍씨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이를 막야할 이유가 있었으며 조재호가 역률로 처단되면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는걸 막을 수 있지 않겠냐는 계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당론서에서는 사도세자를 함께 보호하자며 조재호를 불러들인 것이 홍봉한이었다고 하는데 조재호는 이를 거절했다가 사건이 터지고 더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던 시점에 도성으로 들어와 틈을 봤기에 홍봉한이 그를 처분하는데 앞장섰다고 한다. * 그가 사도세자가 죽을 때 일물을 바친 것에 대해서는 [[모순]]이 있는데 《한중록》의 기록이나 [[정조(조선)|정조]]의 회고에 따르면 정작 '일물'이 들어올 때 홍봉한은 입궐도 안한 상태였기 때문. 홍봉한은 나경언 사건 이후 사도세자의 대명을 풀어주려다 파직당했기에 도성 밖인 동교에 나가 있었고 중간에 다시 [[벼슬]]을 내린 뒤에도 계속 도성 밖에 있었다. 그 날 영조의 [[창덕궁]] 거동령이 내려지고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만난 시점은 이미 정오였으나 거동이 지체되어 오후 1시는 넘어야 영조가 휘령전으로 온다는 명이 다시 있었고 이후에야 영조가 사도세자를 만나 대처분을 내리게 된다. 홍봉한 역시 일이 터진 후에야 동교에서 대처분 소식을 들었고 그 소식을 들은 후 급하게 도성 안으로 들어와 궁 밖에서 대명했다. 죄를 지어 파직당한 몸이므로 영조가 대명하지 말라는 명이 떨어져야 궁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 그렇기에 정조가 말한 주방의 물건이 영조가 대명하지 말라는 명이 떨어지기 전에 들어왔다는 말이 나온 것. 이후 공홍파에서는 그러면 2번째 뒤주가 홍봉한이 바친 거라고 몰고갔지만 정조는 2번째 뒤주도 그 전에 이미 와있었다고 주장한다. [[소론]]계 당론서인 <현고기>에도 당시 홍봉한은 동교에 나가있었다고 뒤주설을 부정한다. 이후 홍봉한이 올린 상소를 보면 그 날 밤 영조를 독대한 자리에서 홍봉한은 "병이 났다"고 핑계를 댔지만 오히려 영조가 "나라가 망하면 백성이 그것을 용납하겠냐"며 홍봉한에게 자신의 명을 따르도록 했다고 한다. 영조에게 올린 상소이기 때문에 사실관계를 왜곡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홍봉한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받아들인건 세자가 뒤주에 들어간 날 밤이고 이 날 영조의 하교를 듣고 나온 홍봉한이 사가에 있던 혜경궁 홍씨와 정조에게 영조의 말을 전했다는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