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범도 (문단 편집) ==== 그 후 ==== 1921년 3월, 자유시에 도착한 홍범도가 당시 주도권을 쥔 대한의용군 중심의 독립군 통합에 찬성했다가 이후 주도권이 고려혁명군으로 넘어가자 1921년 5월 기존 태도를 바꿔 고려혁명군 중심의 통합에 힘을 실은 것도 홍범도로써는 하루라도 빨리 통합이 마무리되어 항일무장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해석이다. 당시 홍범도에게는 대한의용군, 고려혁명군 그 어느 쪽과도 이해관계가 없었다고한다.[[https://www.yna.co.kr/view/AKR20210819098400502|#]] 이후 [[1922년]] 일본의 연해주 간섭군 철수를 조건으로 일본이 요구한 항일무장투쟁 단체의 해산이 이루어지고 나서, 결국 홍범도 이하 공산당 측 독립군은 무장해제되었다. 다른 동료들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거나 다른 지방으로 흩어졌는데, 돌아갈 곳도 가족도 없던 홍범도는 결국 [[러시아]]에 남아 [[소련]] 시민으로서의 삶을 시작해야만 하게 되었으며 이때 2번째 부인 이인복과 재혼했다. [[파일:홍범도장군 입국신고서.png|width=700]] ||홍범도의 소련 입국신고서. '직업' 항목에 '''의병''', '목적과 희망' 항목에 '''고려독립'''이라고 쓴 것이 인상적이다.|| [[1922년]] 2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의 주최로 열린 극동민족대회(극동피압박인민대회 혹은 원동약소민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갔다. 여기서 [[블라디미르 레닌]]이 [[트로츠키]]를 통해 홍범도를 따로 불러 단독 면담을 한 다음 금화와 홍범도라는 이름이 새겨진 은제 [[마우저 C96]]을 선물해 주었다. 독립군 중 트로츠키나 레닌과 단독 면담을 한 것은 홍범도가 유일하며 이때 레닌에게 받은 [[권총]]은 현존하지 않지만 권총집은 지금도 남아 있다. [[http://mn.kbs.co.kr/news/view.do?ncd=2080128|권총집]] [[파일:khonbomdo_avtobiografiya.jpg]] 1923년 8월 [[하바롭스크]]에서 사할린부대 출신 독립운동가 김창수와 김오남으로부터 자유시참변으로 동료들을 죽게 한 배신자라는 이유로 불시에 공격을 당해 이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홍범도는 [[블라디미르 레닌]]에게서 받은 권총으로 이들을 사살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레닌의 증명서 덕에 석방됐다고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