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홍범도 (문단 편집) ==== 자유시 참변 ==== [[1921년]] [[연해주]] 및 [[시베리아]]로 후퇴한 독립군은 결국 소련의 지원을 받기 위해 [[스보보드니|자유시]]로 이동했으며 이 시기 홍범도는 그간의 무훈으로 새로 창설된 [[대한독립군단]] 부총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곳에서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을 목격하게 되는데 많은 독립군이 목숨을 잃었다. 다만 홍범도 측 부대는 이미 자유시에서 무장해제를 한 상태였기에 사상자는 없었다. 윤상원 [[전북대학교]] [[사학과]] 교수에 따르면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의 소식을 전해듣고 '''장교들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고 한다.(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 사변> 논문에서). 자유시 참변 이후 포로로 잡힌 대한의용군 독립군에 대한 군사재판에서 홍범도는 고려혁명군사법원 재판관의 위원으로 참석하게 된다. 우익들이 홍범도를 공산주의자이고 자유시 참변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것인데, 당시 상해파 독립운동가들은 이에 대해 홍범도를 배신자라고 매도했다고 한다. 고려혁명군은 항일의병장으로서 명성이 높은 홍범도를 위원으로 선임해 재판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홍범도가 자신을 선임한 이들에게 이용당했다는 비판의 근거가 될 수 있다. 홍범도는 '''재판에서 병사들이 피해를 보지 않고 공정한 판결이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위원으로 참가했다'''고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위원을 맡은 일은 홍범도 개인에게는 무척 불행한 일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요컨대 자유시참변 전후 홍범도의 행적이 일부의 비판처럼 동족에 대한 배신, 반역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후 그의 활동이 다분히 소련 공산주의 소속의 일원 정도로 후퇴, 축소되었다는 점은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당시 항일 독립진영의 독자적 세력이 일본보다 워낙 열세였고, 때문에 일본에 맞설 타국의 힘을 빌어야 한다는 현실론을 따른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홍범도를 비롯한 사회주의계 인사들에게는 그 대상이 소련이었고, 이승만 등은 외교독립을 통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지원을 이끌어들이는 것을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훗날 임시정부의 광복군도 중화민국 정부와 공조하였고, 김홍일이나 최용덕 등은 중화민국군의 일원으로 싸우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