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범도 (문단 편집) === 전성기: 봉오동과 청산리 === 이후 [[함경북도]]로 수차례 진출해 [[1919년]] 10월 [[함경남도]] [[혜산시|혜산진 일대]]에서의 유격전 성과로 지명도를 높인 홍범도는 [[1920년]] 봉오동 일대에서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이 연합해서 결성한 대한북로군독부 예하 북로 제1군 사령부장(부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를 치르고 그로부터 4개월 뒤 [[청산리 전투]]에 참여해 활약했다. 청산리 전투의 주도적인 인물로 알려진 [[김좌진]]이 [[우파]] 인사이고 말년에 [[김좌진/비판|현지 한인들에게 인심을 잃었던]] 탓에 [[중국]] 내 [[한인]] 사회에서는 청산리 전투의 주요 지휘관으로 김좌진보다 홍범도를 더욱 높게 친다. 홍범도가 현지 주민들에게 민심을 얻고 있었던 것은 당시 일본군의 보고서에서도 드러난다. >…당대(當隊)가 폭도[* 당시 일본군은 의병 세력들을 폭도라고 불렀다.]의 풍모를 가장하고 행동했더니 촌민은 이를 매우 환영하고 자진하여 주식(酒食)을 향응하려고 하였다. 때문에 일반(주민)의 의향을 측정하기 어려운 점이 적지 않다.… >----- >1908년 10월 13일 제3순사대 경부(警部) 와타나베 마사카쓰(波邊正勝)의 보고서 >10월 하순 이도구·어랑촌 및 봉밀구 방면에서 일본 군대에 대하여 완강히 저항한 주력 부대는 독립군이라 칭하는 홍범도가 인솔한 부대였다. '''홍범도의 성격은 호걸의 기풍이 있어 김좌진과 같은 재질이 있는 인물이 아닌 듯하고 앞서 홍범도가 간도 방면을 동분서주하고 있을 무렵 일반 조선인, 특히 그 배하(配下)에 있는 자로부터 신(神)과 같은 숭배를 받고'''… >이도구·어랑촌·봉밀구 부근의 전투에 당면하여 일본군의 포위 중에 빠진 것 같이 그의 전술이 졸렬한 것을 빈정대는 것보다도 몸을 던져 부하를 독려하고 일본군에게 일시(一矢)[* [[일본어]]로 잇시(一矢)는 직역하면 '화살 한 발'이라는 뜻이지만, 관용구로서는 ''''[[혼신의 일격|모든 힘이 소진된 상태에서 상대를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던지는 최후의 일격]]''''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를 보복하려는 것이었다고 간주하는 것이 지당할 것이며, 그는 지금 한쪽 다리에 관통 총상을 입고 치료를 받고 있다 하는데 그에 대한 일면을 판단할 수 있다.… >----- >1921년 [[조선총독부]] 간행「간도 출병 후의 [[불령선인]] 단체 상황」 반면 거꾸로 대한민국에서는 홍범도가 결국 [[소련군]]과 손을 잡았었다는 점 때문에 [[1980년대]] 후반까지도 홍범도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거나 간단하게 언급만 되고 홍범도의 말년도 '독립운동을 하다 아무도 모르게 쓸쓸히 죽었다' 정도로만 언급되었다. 사실은 [[김좌진]]과 홍범도 부대의 공로가 반반이라고 보는 편이 좋으며 특히 [[일본군]]끼리 서로 싸우게 한 작전은 홍범도가 주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