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홍범도 (문단 편집) === 초기 === [[1868년]] [[평안남도]] [[평양부]] [[보통문|서문(보통문)]] 내에 위치한 무열사[* 홍범도의 자서전인 <홍범도일지>에는 문열사로 적혀 있지만 오기로, 무열사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군권을 쥔 병부상서였으며 "위기에 빠진 [[조선]]에 지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파병 반대파와 [[만력제]]를 설득시킨 [[석성]]을 기리기 위해 1593년에 세워진 사당이다. [[8.15 광복]] 당시까지 있었다가 [[6.25 전쟁]] 와중에 [[미 공군]]의 대공습으로 인한 폭격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만수대예술극장이 들어섰다.] 앞마을의 양반집에서 [[머슴]]살이하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출생지가 [[평안남도]] [[양덕군]], [[평안북도]] [[자성군]]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홍범도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산모사망|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머슴살이하던 아버지마저 그가 9살이 되는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것 때문에 당시 어린 홍범도는 자신의 뿌리조차 모른 채 다른 [[양반]]집에 머슴으로 보내졌다. 10대 중반이었던 [[1883년]] 머슴살이를 청산하고 인생을 바꿔보고 싶다는 마음에 [[평양]]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상관을 살해하고 [[탈영]]했다.[[http://www.hongbumdo.org/general-of-hong-bum-do/life|#]][* 홍범도의 입대 불과 1년 전에 [[임오군란]]이 일어났던 것을 생각해 보면 당시에 홍범도가 상관을 살해할 정도로 [[조선군]]이 상상 이상으로 개판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https://search.i815.or.kr/publication/yeoljeon/detail.do?id=9-HD0001-000|#]] 신계사에서의 생활은 홍범도에게 있어서 인생의 전환점이나 마찬가지였다. 평생 교육을 못 받았던 홍범도는 이때서야 신계사에서 글을 깨치고 [[한국사]]에 대해 배우게 되었는데 [[이순신]]도 이 때 알았다고 한다. 홍범도가 출가할 때 상좌였던 [[승려]] 지담(止潭)이 수원 사람으로 이순신 가문인 '''[[덕수 이씨]]'''였다(홍범도일지). 덕수 이씨가 [[이순신|조상]]의 이름값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대대로 무반을 배출하게 된 사연이 있는데 덕수 이씨인 지담이 조상에 대해서 모를 수가 없는 것. 지담에 대해서는 [[1880년]] 승려 의성과 함께 신계사 유리전(瑠璃殿)을 중수한 기록에 그 이름이 등장한다.[[http://www.bulkwa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36580|#]] 승려 신분으로 [[비구니]]였던 이옥구를 임신시킨 뒤 함께 [[환속]]하여 신계사를 떠나 오갈 데가 없게 되어 처가가 있는 북청으로 가던 길에 건달패들을 만나 헤어졌다가 이후 다시 아내와 자식을 다시 만났으며 두 아들과 북청에서 삶을 시작했다고 한다. 북청에서는 한동안 제지소에서 일했으나 [[1886년]] 임금을 체불한 고용주를 말다툼 끝에 살해하고 도주해 [[강원도]] 북부 산악 지대에서 [[1895년]] [[을미의병]] 발생 시기까지 10년 동안 평범한 [[사냥꾼]]으로 생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