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명희 (문단 편집) === 독립운동 ===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출생으로 할아버지 홍승목은 [[일본]]에 우호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홍승목의 시절에 친일파라 함은 [[이완용]]과 같은 [[매국노]]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외교]]적 파트너로서의 친러, 친청, 친일의 의미가 강하다'''고 보면 된다.] 아버지 [[홍범식]]은 [[대한제국]]의 관료로 [[경술국치|한일병합]]에 치욕을 느껴 [[자결]]하였다. 그로 인해 [[일본]]에 있는 대성중학교를 다니다가 한일병합이라는 비보에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1919년 [[고향]]에서 [[3.1 운동]]에 참가하였고 [[상하이시|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보고 왔다.[* 이 때 이광수와 친해졌는데 홍명희는 이광수에게 [[레프 톨스토이|톨스토이]]의 책을 권했다고 한다.] 1927년 [[신간회]] 창설에 참가하여 부회장 직을 맡는 등 굵직한 항일 운동들을 전개해 나간다. 이후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대일보> 사장, [[오산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소설]] <[[임꺽정(소설)|임꺽정]](林巨正)>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데 소설 <임꺽정>이 1928년부터 13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을 비롯해 1930년대 쓴 거의 모든 글은 <조선일보>와 자매지 <조광>에 발표됐다. 일제 치하에서 수감된 문인들 중 유일하게 옥중 집필이 허용된 [[작가]]가 홍명희였으며 홍명희가 수감된 이후 <임꺽정> 연재가 중단되자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조선총독부]] 관리들조차 <임꺽정>에 맛들려서 제정신을 못차렸던 상황. 옥중에서 임꺽정 집필이 완료되면 조선총독부 관리들이 먼저 읽고 <조선일보>에 넘겼다고 한다. 1928년 11월 21일 연재되기 시작된 <임꺽정>은 홍명희의 투옥과 개인 사정 등으로 연재가 4차례 중단됐으며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된 뒤에는 <조광>에 발표됐다.[* <임꺽정>은 토속어 구사가 뛰어나서 ‘살아 있는 최고의 우리말 사전’이라 불리기도 했다. <임꺽정>에 대해 만해 [[한용운]]은 “연재 기간의 연장으로는 [[세계]]적으로 최고 기록일지도 모른다.”고 말한 바 있다. 훗날 손자 홍석중이 이야기를 마무리지었으므로 대를 이어서 창작한 셈. 홍석중 씨가 완결을 발표하기 전에는 미완성 작품이라서 홍명희가 북한에서 소설을 완성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있었는데 홍석중의 발언에 따르면 홍명희는 '소설의 결말은 독자들의 생각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임꺽정을 완성하지 않았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