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홀로코스트 (문단 편집) == 기타 == * 산업적 학살을 위해 독가스를 사용한 최초의 국가가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아니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통령[* 프랑스 제1공화국의 최고지도자는 한국어로 통령이라 번역된다. 대통령은 제2공화국의 [[나폴레옹 3세]]부터이다.]이던 당시의 [[프랑스 제1공화국]]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클로드 리브(Claude Ribbe)[* 카리브계 프랑스 작가.]이 2005년 저술한 '나폴레옹의 범죄들: 히틀러를 위한 청사진'에 따르면, 1801년 나폴레옹의 명을 받고 출동한 르클레르의 프랑스군은 [[아이티 혁명]]을 잔혹하게 진압하곤 포로들을 가스실로 개조한 함선의 선창에 처넣어 이산화황으로 질식시켜 살해했다. 학살에는 아이티 화산지대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유황 덩어리들을 이용했다. 그리고는 가스선을 먼 바다로 몰고 나가 시체들을 바다에 갖다 버린 뒤 다시 돌아와 다음 희생자들을 살해했다. 아이티는 [[프랑스 식민제국|프랑스 제1식민제국]]의 주요 수입원이었고, 그 핵심에는 아이티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있었다. 이 플랜테이션은 노예들을 통해 운영되었는데 [[프랑스 혁명]]의 자유 사상을 접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기존의 흑인들을 그대로 놔두면 노예 노동에 방해가 될 것이었다. 때문에 나폴레옹은 반란 세대를 모조리 제거하고 자유 민권 사상에 물들지 않은 새 노예들을 아프리카에서 데려오고자 했다. 하지만 한 섬의 인구 전체를 신속하게 말살하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연구 끝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 가스실 학살법이 고안되었다. 리브는 그렇게 설치된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은 아이티 흑인들이 10만 명을 상회하며 더 나아가 히틀러의 홀로코스트에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주장한다. 단, 논란은 존재한다. 당시 르클레르의 프랑스 진압군이 아이티에서 [[인종 청소]] 수준의 대량학살을 벌이고 있었던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 '가스실'에 관한 주장은 근거가 매우 약하다. 역사학자 대부분은 이를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가령 아이티 혁명사에 관하여 가장 큰 권위자인 로랑 뒤부아(Laurent Dubois) 버지니아 대학 교수가 2012년에 출판한 역사서인 '아이티: 역사의 후폭풍(Haiti: the Aftershocks of History)'에 가스실 관련 내용은 실려 있지 않다. 리브의 주장은 [[투생 루베르튀르]]의 전기작가였던 빅토르 쇨쉐르(Victor Schoelcher), 19세기 사학자 토마 마디유(Thomas Madiou) 안토인 메트랄(Antoine Métral) 그리고 주스트 샹세라테(Juste Chancelatte) 네 명의 주장에서 근거하나 이들 모두 다 자신들의 서적에서 가스실 학살의 정확한 근거나 출처를 제시하지 않았다. 이들의 주장을 이어받은 리브 또한 심화된 조사 결과를 내놓지 못했다. 또한, 설령 나폴레옹의 가스실 학살이 사실이라 한들, 그것이 10만에 달하는 희생자를 냈다는 주장과 히틀러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리브의 주장은 인과관계가 밝혀지지 않은 비약이다. 때문에 이 주장은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HpkV&articleno=6862413|#]][[https://www.reddit.com/r/AskHistorians/comments/7naqki/french_writer_claude_ribbe_claimed_that_140_years/|#]] * [[유대인]]의 시체에서 지방을 짜내 [[비누]]를 만들었다는 것은 [[도시전설]]이다. 자세한 것은 "[[인체 비누]]" 문서 참고.[* 가죽을 벗겨서 책(나의 투쟁)을 만들었다거나, 나치 전범 중 1명인 한스 뮌히는 유대인 시체가 잘 타지 않자 유대인들을 시켜 시체의 지방을 짜내 시체에 부었다는 등의 루머가 있다.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에서 시체에 휘발유를 뿌려 불태우면서 시체에서 나오는 기름을 다시 퍼부어 더 잘 타게 했다는 말은 있다.] * 유대인을 수용소로 보내기 위한 운송수단은 [[철도]]였는데 가축을 싣는 화물칸에 말 그대로 가축수송과 같이 운송했다. 그 와중에 나치가 정식으로 열차표를 팔아서 철도운임비를 뜯어낸건 덤. * [[아트 슈피겔만]]의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는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인 자신의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과 전후 세대인 그 아들(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충격적인 실화가 나오는데 전쟁이 끝난 후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해방되었는데도 유대인 학살이 계속되었다. 그 이유는 나치는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보내면서 귀금속과 돈, 돈될 만한 물건들은 나치가 갖고, 가질 수 없는 토지나 집, 공장은 폴란드인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전쟁이 끝나면서 유대인들이 돌아오자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이 차지한 집과 토지를 돌려주기 싫었던 폴란드인들은 돌아온 유대인을 죽이거나 추방시켰다. 작중 나오는 대사가 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이런 꼴을 당하려고 그 지옥을 빠져 나온 거죠."''' 이런 일들은 전쟁이 끝난지 1년이 지나서야 [[폴란드]]가 안정을 찾자 중단되었다. 다큐멘터리 "아우슈비츠"에서는 살아돌아온 유대인이 고향에 있는 자기 집을 되찾으려고 하자 그 유대인의 집을 차지하고 있던 새 주인은 그 집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고 보물을 찾기 위해 그 집을 철거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이런 일들은 폴란드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에 지배당하거나 협력했던 모든 국가들에서 있었다. * 탈출, 혹은 연합군에 의해 수용소가 해방되자 굶주려 있던 유대인들은 연합군이나 민간인들이 주는 음식을 먹다가 [[토사곽란]]으로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 오랫동안 못먹어 작아져 있던 위장이 갑자기 많은 음식을 섭취하게 되니까 놀란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고칼로리 음식을 먹이기보다는 죽이나 수프같은 몸이 소화하기 유동식을 먹인 다음에 기운을 차리게 만드는것이 정석이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도 나치의 만행에 분노한 이지 중대원들이 유대인들에게 독일 민간인들에게서 징발한 빵과 치즈를 나눠주다 군의관에게 제지받는 장면이 있다. 그나마 서방 연합군은 이 정도였지만 의료체계 및 수준이 뒤떨어지는데다 작전 환경 특성상 기름이 매우 많은 전투식량을 보급받았던 소련군은 유대인들에게 먹을 것을 지급했다가 유대인들이 그걸 먹고 죽어서 당황했다는 기록이 간간히 있다. [[대숙청]]으로 [[굴라크]] 신세를 진 소련군들도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보고 경악했다. 소련의 굴라크는 가혹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합리적인 면은 있었다. 그러나 나치는 "수용소=사형장"이라는 공식이 적용되어 소련보다 더 비인간적으로 운영되었다. * 1944년 7월 소련이 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를 점령하면서 처음으로 홀로코스트의 실상을 알게되었다. 이런 학살극을 보고 소련은 놀라서 별도의 조사위원회를 꾸려서 조사했고, 모든 자료를 기록하고 영상으로 만들어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소련과는 별개로 1943년에는 [[폴란드 국내군]] 요원으로 아우슈비츠를 탈출한 [[비톨트 필레츠키]]가 아우슈비츠에 대한 정보가 담긴 [[https://en.wikipedia.org/wiki/Witold%27s_Report|비톨트 보고서]]를 제출했고, 1944년엔 [[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en/timeline-event/holocaust/1942-1945/auschwitz-report|아우슈비츠를 탈출해 스위스에 도착한 슬로바키아 유대인들]][* 같이 탈출한 유대인인 [[https://en.wikipedia.org/wiki/Rudolf_Vrba|루돌프 브르바]]와 [[https://en.wikipedia.org/wiki/Alfr%C3%A9d_Wetzler|알프레트 베츨러]]는 독일이 패망한 뒤 각각 캐나다와 체코슬로바키아에 정착해서 천수를 누렸다.]이 헝가리 유대인 기자 [[https://en.wikipedia.org/wiki/George_Mantello|죄르지 만들]][* 이탈리아식 이름은 조르조 만텔로. 2차대전이 끝나고 이탈리아에 정착. 스위스를 통해 유대인들을 피신시켰다.]를 통해 아우슈비츠의 실상을 알리기도 했다. 의외로 서방 측에선 보도가 소련보다 늦었는데, 너무 어마어마한 내용이라 연합군의 지원을 더욱 요구하려는 프로파간다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서방 연합군이 실상을 알게 된 것은 해를 넘겨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해서, 오드루스 수용소와 부헨발트 수용소에 도달하게 되면서였다. 연합군도 이런 참극에 놀랐고, 사령관들이었던 아이젠하워, 패튼, 브래들리는 그걸 믿지 못해서 오드루스 수용소를 직접 보러 방문하기도 했다.[* 이런 광경을 목격한 패튼은 건물 뒤로 돌아가서 구토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괄괄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장군답게, 그 지역 근처에 사는 독일인 수천명을 모조리 불러모아서, 강제로 그러한 학살광경을 보게했다.] 그 보고가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 연합군은 기자들에게도 이를 보게하고, 대대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 유대인 중 상당수가 홀로코스트를 피해 [[미국]]으로 향했다. 이와 관련된 [[음모론]]도 많다. * 홀로코스트의 최고령 생존자인 앨리스 헤르츠좀머 씨가 2014년 2월 24일에 11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http://www.bbc.co.uk/news/world-europe-26318383|#]] * 앞서 언급된 것처럼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는 유대인뿐만이 아니다. 동성애자, 집시, 공산주의자, 여호와의 증인, 장애인들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특히 [[집시]]들은 '포라이모스(Porajmos)'라는 단어가 있을 정도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로 유명한데, 적어도 80만 이상이 죽거나 이로 인해 유럽내 집시 인구가 소수민족 중에서도 존재감이 미미한 수준으로 줄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많다. 다만 집시들은 유대인과 다르게 홀로코스트가 아니라 국방군 등에 의한 무자비 학살의 대상으로 희생당한 사람도 많고, 정확한 기록이 부족하여 사망자수가 유대인보다 훨씬 부정확하다. 그래도 많은 피해자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고 1944년 8월 2일 하루에만 4,000여 명의 집시들이 학살됐다. 지금도 살아남은 집시들은 '집시들의 날'을 제정해서 이들의 희생을 추모한다. 하지만 홀로코스트 희생에 대한 동정여론은 모두 유대인들에게 돌아갔고, [[독일]]과 [[스위스]]의 배상금은 유대인 희생자도 아닌 [[시오니즘]] 단체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건국비용으로 소모되었다. * 동성애자들도 마찬가지로, 희생자들은 5,000명에서 15,000명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주로 [[게이]]들이 많이 학살되었다.[* 이건 당시 서양에서 여성은 2등국민으로 취급되어 동성애를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후 배상도 가장 차별받은 케이스였는데, 당시 동성애자들에 대한 유럽, 아니 세계의 사회적 시선은 그야말로 벌레 보듯한 시선이었기 때문이다(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한 영국의 [[앨런 튜링]]도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화학적 거세를 받았을 정도다.). 1960년대 후반에야 동, 서독에서 관련법이 제정되었다. 나치는 이들에게 분홍색 역삼각형 문양을 붙였는데, 이것을 뒤집은 분홍색 삼각형은 '''핑크 트라이앵글(Pink Triangle)'''이라고 하면서 게이 인권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 대량 학살이야 인류 역사상 흔히 일어난 일이었지만, 수백만 명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다는 사실은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제국주의 시절 때의 학살도 이야기가 많지만, 그래도 멸절을 목표로 학살을 저지른 경우는 매우 드물다. 수탈이 기근으로 이어지거나, 전염병이 돌거나 하는 간접적인 희생자가 가장 많고, 직접적인 학살도 잔혹해봐야 반항하는 지역 하나를 본보기로 말소하는 정도지 그 인종 자체를 없애버리겠다고 저지른 경우는 없다. 스페인의 아즈텍 정복 당시에는 심지어 동맹을 맺은 원주민들에게 그 대가로 자치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틀락스칼텍]]이 대표적인 예.] 영화와 미디어 사업을 꽉 쥐고 있는 게 유대인들이었던 만큼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소재로 나왔다. 하지만 중동에서는 요새국가화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탄압이 점점 심해지는 데다가 해외의 유대계들도 이에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짓을 터뜨려서, "지금의 이스라엘이 과거 나치랑 다를 바가 뭐냐."라는 비난의 소리가 나올 정도이다. 덕분에 홀로코스트는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불쌍한 유대인"이라는 이미지는 날아가버려서 홀로코스트 관련 영화가 나오면 호불호가 갈리는 등 예전만한 평가를 못 받는다. 대표적인 예가 [[디파이언스(영화)|디파이언스]]와 1943년 유대인 게토 봉기를 다룬 영화 업라이징.[* 하지만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의 경우 같은 홀로코스트를 주요 내용으로 삼았지만 일방적으로 유대인 옹호와 나치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열한 유대인', '좋은 독일인' 등 보다 작품을 입체적이고 중립적으로 만들어 놓아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 사실 홀로코스트에 앞서 벌어진 멸절 학살의 시초로 보는 게 있으니 바로 [[아르메니아 대학살]]이다. 1915~1918년 사이에 오스만 제국에서 아르메니아 및 아시리아인, 아랍 무슬림들을 절멸하려는 계획을 잡아 150만 가량 아르메니아인들이나 60만 이상 아시리아인들과 아랍인들이 마구잡이로 학살당했다. 하지만, 철저하게 잊혀졌고 1933년 히틀러는 연설에서 지금 아르메니아 학살을 기억이나 하냐고 홀로코스트도 얼마든지 넘어잘 수 있다고 주장할 정도. 결국 이 학살은 1965년에서야 [[우루과이]]가 인정했고 세월이 지나 1990년대에 오면서 [[아르메니아]]가 독립하면서 비로소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얄궂게도 아르메니아와 사이가 안 좋은 이스라엘이 이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 게다가, 아르메니아인 학살로만 인식되어 아랍권 무슬림 학살은 넘어가냐고 분노하고 2020년 아제르바이잔과 전쟁을 벌이던 아르메니아에 대하여 아랍권과 이스라엘의 외면 및 이스라엘의 아제르바이잔 강력지원 등이 곁들어 아르메니아가 패하고 말았다. * '정말 600만이 죽었나'라는 책에선 실제론 이 수치가 매우 부풀려졌다고 주장했다. 최대로 추산해봐야 40만이 넘지 않는다고 하는데…문제는 이거 저자가 영국민족전선(British National Front)의 부의장과 당 기관지 편집장을 지냈던 사람이라는 것. 이 영국민족전선은 쉽게 말해서 영국의 [[네오나치]]들이다. 정당은 백인만 가입할 수 있고, 정책도 백인을 제외한 사람들의 이민을 금지한다는 등 극우 파시스트에 [[인종차별]] 성향을 보인다. 당연히 이 책에도 객관적인 시각따윈 없고, 그 어떤 역사학자도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 다만 학살자 수가 부풀려져 있다는 주장이 위에 네오 나치 같은 또라이가 아닌 이들도 제기한 사항이다. 이를테면 1950년대 이스라엘에서도 200~400만 정도로 추정했다는 것. 그런데 학살자 수를 더 늘려서 배상금을 더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은 바로 유대인이자 조부모가 아유수비츠에서 학살당한 노르만 핀켈슈타인이다. 당연히 나치에 대해서는 이를 갈고 있으며 학살극의 존재를 분명히 인정한다. 다만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를 돈벌기 사업으로 쓰며 피해자 상당수에게 돈을 안 주며 엉뚱한 사람이 가로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핀켈스타인은 <홀로코스트 산업>이라는 책자로 피해 보상금을 일부 시오니즘 극단주의자들 배를 채우게 했다고 비난하며 나아가 팔레스타인에서 나치가 하는 짓을 유대인이 벌인다고 비난하고 있다. [[놈 촘스키]] 또한 유대인이지만 그도 1950년대 200~400만이 갑자기 수가 늘었다면서 돈 더 달라고 하곤 그걸로 이스라엘 건국과 일부만 배를 채운 더러운 보상금이 되었다고 비난하고 있다. 실제로 2010년대에 이스라엘은 학살 피해자가 더 있다고 주장하며 돈 더달라고 했지만 이번에는 독일이 그동안 준 돈은 뭐냐며 이번에는 안 준다고 맞서고 있고 노엄 촘스키도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산업이라고 비난했다. * 2015년 10월 21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http://www.huffingtonpost.kr/2015/10/22/story_n_8354022.html|홀로코스트는 팔레스타인이 히틀러에게 사주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발언하여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당시 팔레스타인 인사인 하지 [[아민 알 후세이니]]가 친나치 활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네타냐후는 아예 대놓고 팔레스타인 때문에 유대인 학살이 발생했다고 주장해 버린 것.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냥 묻혀졌다. 미국에서도 이렇더라 보도하고 그랬냐? 넘어갔으며 극단적인 일부 유대인들만 옹호했다. 놈 촘스키는 "아랍 모두가 나치를 지지했다고 늘려서 엉터리 주장해라"고 비난했다. * 홀로코스트 여파는 폴란드의 민족 구성을 완전히 바꿔 놓을 정도였다. 폴란드는 홀로코스트가 일어나기 직전만 하더라도 유대인이 약 3백만 명 가량 거주하여 유대인 비율이 상당히 높은 나라였다. 그러나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일찍 나치 점령지가 되었고, 대규모 수용소를 건립하는 등 가장 혹독하게 학살이 이루어지면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수용소의 죽거나 외국으로 도피했기 때문에 종전 직후에는 이전의 1%인 3만 명조차 남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현재 폴란드는 인구의 대부분이 폴란드계이며 유대인은 극소수인종이 되었다.[* 더 결정적으로, 독일계 주민들이 독일 영내로 추방당하고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2차 대전 전까지 이 두 민족은 폴란드의 주된 소수 민족이었다.) 거주 지역이 소련에 넘어가면서 폴란드인이 97%를 차지하는 거의 단일 민족 국가가 되어 버렸다.] * 이러한 유대인 학살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명백한 범죄행위이지만, 그것이 과장됨과 함께 잘 알려지지 않은 찜찜한 진실 또한 존재한다. 우선, 독일은 유대인 학살에 대해 애도하는 모습을 많이 보인 방면, 제1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 제2제국이 식민지에서 저지른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이나 마지마지 운동 당시의 초토화 작전에 관해서는 2010년대까지 '미안하기는 한데 배상이나 공식적 사과 같은 건 좀 그런데...' 식의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현재 [[이스라엘]]과 [[유대인]]이 상대적으로 국제 사회에 영향력이 크다는 점(반대로 오늘날의 [[나미비아]]와 [[탄자니아]]가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덜하고 저개발국인 점)과, 유대인 또한 백인인 반면 중남아프리카에는 흑인이 많은 점을 고려하면, 이 또한 일종의 국가적/인종적 차별이 아닌가, 또한 오늘날 이스라엘이 저개발국이거나 유대인의 영향력이 오늘날처럼 막강하지 않았으면 독일이 진정한 사과를 했을까 의심스러운 면이 있다는 시선도 있지만 독일이 자신들이 거의 전멸시킨 집시들의 보호에 유럽 국가중 제일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점이나 체코 침공날이나 2차대전 발발일인 9월1일과 종전기념일날 폴란드와 체코 그리고 벨기에 러시아 등이 추모를 하는 것을 보아 앞선 시선에 대한 반론이 강한 편이다. 물론 이런 독일의 모습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한 가면이라고 비난하는 시선이 가장 큰 피해를 본 동유럽에서 강하게 있다는 것도 유념해야 한다. * 연합군의 전쟁 중 벌인 범죄나 다른 독재자들의 학살을 빌미로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물타기 하려는 자들도 있다. 아니, 꽤나 많다. 하지만 여타 독재정권에 의한 희생자는 그들이 직접적으로 지시한 학살 또한 정치적인 의미의 학살로, 자신의 체제에 반하는 자나 또는정적이라는 '계층'또는 '정치집단'을 타깃으로 했다. 따라서 이는 사실 역사적으로 계층 간의 반목이나 정치적인 대립이 발생했을 시에 우발적으로, 또는 계획적으로 숱하게 일어났던 학살들과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이러한 학살은 보통 대립 상황이 수그러질 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나치의 경우 어느 한 '''인종 자체를''' 유전적으로 열등하다는 이유만으로 '''태생적인 '존재 가치' 자체를 부정했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전무후무하다. 그리고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타국을 침공하면서 이루어졌지만, 결정적으로 본국에 살던, '''자신이 스스로 독일인'''이라고 여기던 유대인들까지 학살한 것이다. * 네오 나치들이나 [[영국]]과 [[윈스턴 처칠]]에 대한 반감을 가진 좌익들에[* 다만 영미권을 증오하는 한국 [[넷우익]]들도 똑같이 벵골 대기근을 들먹이며 처칠이 히틀러보다 더 잔인한 학살자라고 깐다.] 의해 [[벵골 대기근]]이 자주 거론되며 물타기가 이루어지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완전히 왜곡된 것이다. 보통 '독일로부터 영국을 구한 윈스턴 처칠은 세계대전 당시, 미얀마를 점령한 일본의 인도 침략을 우려해 벵골 지역의 쌀을 모조리 뺏어가고, 수백만의 [[벵골]] 지역의 주민을 굶겨 죽임으로써 학살한 적이 있다. 심지어 인도가 영국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처칠은 이를 묵살하고, 미국과 호주가 벵골 지역에 대해 도움의 손길을 뻗었으나 처칠은 상륙 불허로 대답해 무려 700만의 인구를 굶겨 죽인 적이 있다.'라는 말들이 나도는데,[* '''물리학자''' 마두스리 무케르지의 서적에서 인용된 내용이다.] 이것은 악의적인 왜곡이다. 당시 대기근이 일어난 1943년은 일본 해군이 인도양과 동남아시아 해역에서 전력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안전한 수송루트가 보장되지 않은 상태였고 일본군의 버마 공세로 인해 육지 수송로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Bengal_famine_of_1943#Debate_over_primary_cause(s)|해당항목을 보면 42년 1월부터 43년 5월까지 추축군이 인도양에서 약 87만톤의 영국과 연합군의 상선을 격침시켰다고 나온다.]] 현 항목은 수정되어 2018년 1월 10일 이전의 내용에 기재되어 있으며 현재 항목에는 [[https://en.wikipedia.org/wiki/Bengal_famine_of_1943#1942%E2%80%9344:_Refusal_of_imports|당시 일본군의 인도양 진출때문에 수송의 어려움에 관한 내용]]으로 서술되어 있다. 연합군도 43년 1월이 되어서야 전쟁물자 투입과 연합군 장병들의 투입 비율을 조율하는 카사블랑카 회담을 열었다. 즉 43년 기준이면 연합군이 반격을 막 시작할 때였다. 일본 해군이 완전히 몰락한 것은 44년이었다.] 심지어 [[https://en.wikipedia.org/wiki/Bengal_famine_of_1943#October_1942:_Natural_disasters|42년에는 작물 병충해와 태풍이 같이 발생]]한 최악의 자연재해까지 겹쳤다. 영국 정부도 식민지 인도를 상실할 수 없었기 때문에 43년 9월부터 기아를 막으려고 했으나 탁상행정이었고 이렇게 지원을 온 식량들도 지방 지주와 상인들의 매점매석으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전통적으로 지방분권적이던 인도의 지방관들이나 인도 제국의 제후국들 사이에 소속감 따위는 없었기에[* 이는 인도인들이 열등하다거나 특별히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다. 인도는 인도 제국 이전까지 하나의 확고한 정치체제를 길게 유지하며 동질성을 구축했던 적이 없기 때문에 동족 의식이 없었던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아대륙 내의 수많은 다양한 언어 사용자들과 민족들 그리고 서로 다른 종교의 신도들은 각자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수많은 집단들을 외형적으로나마 한데 묶은 것이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 제국이며, 인도인이라는 개념은 이 거대한 틀 내에서 수많은 민족들이 간디와 네루를 중심으로 뭉쳐서 영국에 저항한 결과 만들어진 것이다. 즉 지리적 의미의 인도 개념과 달리 민족적 의미의 인도는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는다.] 원조 물자를 공평하게 분배하기보다는 제 하나 살기 위해 식량을 마구 빼돌린 것. 심지어 위에서 식량 수송을 거부했다는 말과 다르게 처칠은 루즈벨트에게 보낸 서신에서 호주를 통한 물자지원을 요청했고 전선에 투입되는 물자를 줄여서 기아 대책을 추진했지만 부족해서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출처 Churchill and Roosevelt, Volume 3: The Complete Correspondence, Warren F. Kimball, 117p] 홀로코스트처럼 특정 인종의 말살을 위해서 국가적인 역량을 총동원하여 '''의도적으로''' 대기근을 발생시켰다고 볼 여지는 전혀 없다. 게다가 공식적인 기록에 나타나는 300만 내외의 희생자를 유대인 학살 피해자 수보다 많은 700만으로 부풀리는 것에서도 악의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 유명한 프로레슬링 매니저 [[폴 헤이먼]]의 모친이 생존자들 중 한명이다. * 2020년에 네덜란드가 홀로코스트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였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1357990|#]] * 대한민국 출입국관리법 제11조 1항에 따르면 홀로코스트 가담자는 대한민국 입국이 금지될 수 있다.[* 출입국관리법 제11조 1항 : 법무부장관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외국인에 대하여는 입국을 금지할 수 있다. (중략) 7.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사이에 다음 각 목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정부의 지시를 받거나 그 정부와 연계하여 인종, 민족, 종교, 국적, 정치적 견해 등을 이유로 사람을 학살ㆍ학대하는 일에 관여한 사람[br]가. 일본 정부[br]나. 일본 정부와 동맹 관계에 있던 정부[br]다. 일본 정부의 우월한 힘이 미치던 정부] 일본 정부와 동맹 관계에 있던 정부의 지시를 받아 인종, 민족을 이유로 사람을 학살, 학대하는 데 관여한 사람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 홀로코스트가 벌어지던 당시 이런 유대인 절멸정책에 대해 대놓고 반대는 못해도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던 독일인들이 꽤 있었다.[* 내용출처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 《나치의 병사들》, 민음사.] 그런데 사실 그들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는 유대인이 불쌍하다거나 인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당시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당장 출처인 책에 나오는 내용 중에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갇힌 독일군들의 대화들이 적혀있는데, 그 중 하나에서 독일군 포로들은 히틀러의 무능함을 비판하면서 '''그가 잘한 일은 유대인 정책밖에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다름아닌 '''유대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연합군의 보복을 두려워한 것인데, 당시 나치 독일의 군인과 민간인들 다수가 영국과 미국은 유대인 자본가들에게, 소련은 유대인 공산당원에게[* 독일은 공산주의를 창시한 카를 마르크스가 유대인이라는 점을 활용하여 소련을 유대볼셰비키즘이라고 부르며 독일군을 아시안 몽골로이드와 유대 볼셰비키즘으로 부터 인류에서 가장 우월한 아리아인의 문화를 지키는 군대라고 포장했다.] 지배당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홀로코스트의 강도에 대해서도 견해 차이가 있었는데 한 독일군 포로는 전쟁 당시 아버지와의 대화를 회상하면서 자신은 독일 내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것은 동의하지만,[* 나치집권 시기 카톨릭 주교들이 주도하는 T-4 프로그램 반대 시위가 자주 일어났지만 유대인 추방에 반대하는 시위는 없었다.] 이렇게까지 잔혹하게 죽일 줄은[* 수용소를 얘기하는게 아니라, 동유럽 점령지에서 [[무장친위대]]가 벌인 유대인 민간인 학살을 두고 얘기한 것이다.][* 단 독일의 일반인들은 홀로코스트가 어떻게 이뤄지는가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말살수용소 현장을 직접 보라고 미군이 독일인들을 끌고 왔을 때 자기들은 몰랐다고 변명한 사람들이 많았던 건 유대인을 거기 끌고 가서 강제노역시키다 필요없어지거나 저항하면 죽인다는 걸 몰랐다는 의미가 아니라, 처음부터 '''분류기준에 따라 노약자와 아이들을 가스실로 보내고 나머지도 처음부터 죽이는 걸 목적으로 노동력만 잠시 쥐어짜는 수준이었다는''' 걸 몰랐다는 의미이다. 나치는 유대인 수용소에 대해 겉으로는 강제노동수용소라고 선전했고, 학살도 SS가 주도하고 국방군은 외곽경비만 맡아서 자세한 실상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나중에 많은 나치 전범들이 유대인 학살수용소에서 근무했음에도 자기는 자세한 건 모른다고 말한 게 이런 이유 때문이다.] 몰랐다고 말했다. 이에 아버지는 이런 짓을 계속 벌이면 언젠가는 [[시몬 비젠탈|보복]]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받을 수]]밖에 없다고 한탄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