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환(재해) (문단 편집) == [[한반도]]에서의 호환 == || [youtube(oQQdlg83WkU)] || [[파일:external/www.interview365.com/20087218513735625.jpg]] >'''"조선사람의 1년의 반은 호랑이를 쫓느라고 보내고, 나머지 반은 호랑이에게 잡아 먹힌 사람의 문상을 가느라 보낸다.'''" 이 문장은 영미권에서는 '옛 중국인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로서 조금 다른 형태로 알려져 있는데, "1년의 여섯 달은 조선사람이 호랑이를 사냥하러 다니고, 남은 여섯 달은 호랑이가 조선사람을 사냥하러 다닌다"가 그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여름에는 사람들이 총들고 나가서 호랑이를 잡아족치고, 겨울에는 굶어죽을 지경이 된 호랑이가 민가로 들이닥친다는 식. 과거 [[한반도]]에는 [[시베리아호랑이]]가 많이 살았고 더불어 인구밀도도 현대 국가 못지 않게 높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호환이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이처럼 호랑이는 현실 속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기에, 이를 피하기 위해 집집마다 빗장을 걸고 호망이라는 굵은 그물을 만들어 지붕부터 마당까지 덮는 등 호환을 막는 방법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심리에도 큰 영향을 주어,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담아 호랑이를 [[산군]], 산신령이라고도 부르기도 했다. 지방 행정력이 상대적으로 미비했던 [[신라]]나 [[고려]]시대는 조선처럼 정책으로 호랑이 전담 사냥팀을 구성하고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숫자의 호랑이가 서식하게 되었다. 심지어 호랑이는 서울에도 판을 쳤는데 아예 대궐에도 들어오거나 [[창덕궁]]에 새끼를 낳기도 했다.[[https://sillok.history.go.kr/id/kna_14007018_003|#]] [[조선왕조실록]]에 호환이나 호랑이를 검색하면 호랑이 관련 기사가 수두룩하게 뜬다.[[https://sillok.history.go.kr/id/kpa_10412017_003|#]] 호환으로 인한 희생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태백산]] 일대에는 호식총(虎食塚)이라는 돌무덤이 약 160기 존재한다. 이는 호랑이가 먹다 남긴 사람의 머리와 뼈를 수습해 만든 무덤이다. 호랑이는 사냥감의 머리 부분은 대개 먹지 않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들은 호환의 희생자는 호랑이의 종 노릇을 하면서 또다른 사람을 호랑이의 먹잇감로 삼게 하는 [[창귀]](倀鬼)가 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창귀를 소멸시키기 위하여 화장을 하고, 창귀가 세상에 나오지 못하도록 돌무덤에 가두어두고, 쇠꼬챙이를 꽂아 창귀를 제압하고자 했으며 이러한 풍습을 호식장(虎食葬)이라고 하는데, 당시 사람들에게 호환이 얼마나 무서운 재앙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연암 [[박지원(실학자)|박지원]]의 소설 [[호질(소설)|호질]]에도 이런 창귀들이 나와 호랑이 옆에 붙어선 호랑이에게 이런 저런 사람들을 잡아먹을 걸로 추청한다.] 또 오죽하면 한국과 중국 등의 아시아에서도 창귀를 다루며 인간으로 둔갑하는 [[추인(요괴)|추인]]이라는 식인 호랑이 요괴도 있을 정도이니 말 다 했다. 사실 과거 한반도에는 [[아무르표범]], [[늑대]][* [[유라시아늑대]], [[몽골늑대]].], [[승냥이]], [[우수리불곰]], [[아시아흑곰]] 등 다른 맹수들도 살았으니 이들에 의한 인명피해 역시 상당했을 것인데, 이 또한 호환이라 여겼다. 그냥 맹수한테 당한 사람이 나오면 기본적으로 호랑이의 짓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 고을에 수령을 파견하는 등 지방행정력이 튼튼한 조선시대에 들어선 체계적으로 호랑이 사냥을 할 수 있었다. 백성을 해치는 호랑이를 제거하는 일은 조선의 국시인 유교이념에 부합하며, 호랑이 사냥을 위해 산과 들을 누빔으로서 자연스럽게 군대 기동훈련을 겸할 수 있어 권장되었다. 조선 중기 때부터는 호랑이 사냥만을 담당하는 부대인 착호갑사를 두어 집중적으로 호랑이를 사냥했다. 호랑이를 많이 잡아서 종4품, 현대로 치면 중령급의 벼슬을 얻은 사례도 있으며, 호랑이 퇴치를 위해서라면 '''임금의 허락 없이도 군대를 움직일 수 있었다.''' 이것은 쿠데타 위기시와 더불어 국왕의 재가가 필요없이 군대를 움직일 수 있게 허용된 몇 안 되는 경우로, 실제로 쿠데타용으로 악용한 사례도 있다. [[인조반정]]때 이 점을 이용해 호랑이 잡으러 간다고 부대를 모아서는 실제론 반정에 썼는데, 그 후로도 이 제도를 건드리진 않았다. 달리 말하면 '''[[반란]]에 악용된 전례가 나와도 선조치 후보고 운용을 지속해야 할 정도로 호랑이로 인한 재난이 심각했다'''는 것으로 봐도 된다. [[유럽]]에서도 [[제보당의 괴수]] 사건을 봐도 알겠지만, 맹수에 의한 연쇄살인에 국왕 명령으로 군대가 출동한 걸 생각하면 대충 파악이 될 만하다. 이런 체계적인 사냥이 200여 년간 지속되면서 조선 개국 후 200년 이상이 지난 인조 시기에 이르면 한반도의 호랑이 개체수는 상당히 많이 줄어들었고 호랑이와 경쟁적 배제 관계에 있는 늑대의 개체수가 증가했다. [[파일:external/pds27.egloos.com/c0034707_50d02d733aa94.jpg]] 19세기 말엽 조선 포수 사진. > 그리고 변방 백성 중에 조총(鳥銃)을 잘 쏘는 자를 보건대, 호랑이가 3, 4간(間; 약 5.455m ~ 7.273m)쯤에 있을 때 비로소 총을 쏘는데 명중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없으니, 묘기(妙技)라 할 수 있습니다. -영조 즉위년 갑진(1724) 10월 15일(을유) , 승정원일기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조선인 및 일본인, 외국인(중국이나 러시아인 포수들도 꽤 많이 고용했다) 포수뿐 아니라 육군 병력까지 동원한 일본의 [[해수구제사업]]과 토목공사, [[6.25 전쟁]] 등으로 인해 서식처와 개체수가 멸종에 달해 남한에서는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한국에선 과거 심마니들이 산에서 호랑이를 만나면 엎드려 절하고는 호랑이가 물러갈 때까지 그대로 엎드려 있는 대처법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런 대처법이 생긴 이유 중 가장 유력한 설은 조선시대엔 호랑이는 산의 왕으로 인정받았기에 '왕에게 절을 해주면 기분이 풀려 돌아갈 것이다.'라는 민간 신앙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이에 대해서는 "그래서 한국에서 호환이 많았나"라든가, "눈 앞에서 엎드린 거라 호랑이가 생소해서 움찔해 물러간 건가" 등등의 추측이 많지만, 전문적인 연구나 실증이 없으니 그저 추측의 영역이다. 여러 명의 심마니가 엎드리면 한 명만 잡아가고 나머지 사람은 살 수도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혹은 상술했듯 호랑이가 인간 같은 직립 보행을 하는 생물의 길이가 어마어마하게 긴 것으로 착각할 수 있어, 눈 앞에서 만난 키 1.6m, 몸길이 6m의 괴생물이 갑자기 엎드리는 것을 보고 [[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도약 공격을 하려고 웅크리는 것]]으로 착각해 놀라서 도망쳤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면 [[죽은 자는 말이 없다]]든가. 아무튼 멀쩡히 살아남아서 이런 이야기를 한 사람이 있는 것을 볼 때 100%는 아니라도 통한 사례가 없진 않았던것 같다. 호남지역에서는 '호랭이 씹어 갈 XX'라는 욕이 있다. '호랑이가 씹어(물어) 가다' 는 호환을 의미한다. 호환이 욕으로 나올 정도로 호환은 한국에서 엄청난 재해였고 이런 호환을 토대로 한국에선 ‘육발이’라는 호랑이 요괴가 나오기도 한다. 육발이는 발여섯이란 말그대로 다리 여섯달린 호랑이를 말하며, 사람을 엄청나게 먹은 호랑이는 다리가 여섯이되어 보통 호랑이보다 더 빠른 속도와 지혜 여기에 높은 도력을 갖춰서 사람으로 변신해서 사람을 유인하기도 한다. 육발이는 특이하게 바둑이나 투전 같은 게임을 아주 잘하는데, 사람으로 변신한 육발이는 사람을 꾀어서 바둑과 투전을 제안하고 이에 응한 사람이 이기면 육발이는 큰돈을 주지만 지면 육발이에게 얄짤없이 잡아먹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