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플리테스 (문단 편집) == [[고대 그리스]]의 중장보병 == ||{{{#!wiki style="margin: -5px -10px" [[https://www.worldhistory.org/uploads/images/152.jpg?v=1698342369|width=100%]]}}}|| ||<-3><:>언어별 표기와 발음|| ||<:>[[그리스어]] 단수형||<:>πλίτης||<:>호플리테스|| ||<:>그리스어 복수형||<:>όπλίται||<:>호플리타이|| ||<:>[[영어]]||<:>hoplite||<:>홉라이트|| [[고대 그리스]]의 중장보병.[* 고대 그리스 중 초창기이자 청동기 시대인 [[미노스 문명]] - [[미케네]] 문명 - [[암흑시대]] 이후 철기 시대 폴리스에서 등장한 중보병종을 가리킨다.] 전투장비들(πλα/호플라)을 완전히 갖춘 병사라는 뜻이며, 영어로 직역하면 [[맨앳암즈]]다. 호플리테스/호플리타이는 고대식 발음이고, 현대 그리스어로는 오플리티스/오플리테라고 읽는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폴리스]]들의 중장보병으로 사용장비는 모두 개인이 사비로 구입해야 했기 때문에[* [[스파르타]]는 예외로, 시민 전원이 전업군인이었기 때문에 장비를 전부 국가에서 제공했다.] 경제력이 있는 중상류층이 대다수였다. 도시국가의 [[시민]]들은 기본적인 군사훈련을 받았고, 일정 연도 동안 [[군대]]에서 복무해야 했으며 국가의 부름이 있을 때는 이에 응해 [[전쟁]]에 나가야 했다. 훈련도도 높고, 무장도 고대 군대치고 우수한 편이라 그리스 중장보병은 육박전이 뛰어난 당대의 정예군으로 정평이 났다. 일부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로 건너가 황실친위대 내지 용병으로도 활동하기도 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https://steel-mastery.com/image/catalog/Category_pics/Hoplit/greek-warrior-5-638.jpg|width=100%]]}}}|| 사용하는 장비는 개인이 구입하는 방식이었으므로 표준화되진 않았으나 각 [[도시국가]]에 따라서, 그리고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일정한 규칙은 존재했다. 기본적으로 [[청동]]으로 만든 투구와 흉갑, 정강이받이를 착용했는데 이것들의 무게는 약 27kg 정도 나갔다.[* 하지만 모든 병사들이 중무장한 것은 아니었고 경제력이 없는 농민병은 경보병이었는데 창과 방패, 보조무기, 투구 정도를 착용하는 수준이었다. 특히 부가 보호대를 갖추더라도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팔 보호대는 오른쪽에만, 정강이 보호대는 왼쪽에만 착용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왼팔은 방패를 들기 때문에 방패에 가려지니 방패를 잃지 않는 한은 보호대가 없어도 노출되지 않고, 밀집 대열을 짤 때는 왼쪽 다리를 앞으로 내밀고 오른쪽 다리는 뒤로 가서 왼쪽 다리만 노출되고 오른쪽 다리는 가려지기 때문.] 주 무기는 동아시아의 [[모(무기)]]에 해당하는 창으로 도리(δορύ)라고 했으며, 길이는 약 2.4m정도였다. 방패는 나무에 청동판을 덮은 아스피스 (ασπις)를 사용하였으며, 창이 부러지거나 잃어버렸다든지, 대형이 무너졌을 때에 사용하기 위한 보조무기로 [[크시포스]](ξίφος)라고 하는 양날 한손검이나 [[팔카타]]라는 묵직한 한손검을 사용했다. ||<#FFF><:>{{{#!wiki style="margin: -5px -10px" [[https://i.pinimg.com/originals/51/eb/b9/51ebb9174baf2eb033c611757cb4da30.jpg|width=100%]]}}}||<#FFF><:>{{{#!wiki style="margin: -5px -10px" [[https://i.pinimg.com/736x/dd/f7/af/ddf7af0757a5681040dc42b064bac4f3.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https://i.pinimg.com/736x/48/9c/1a/489c1af3a2bed5995f22714e4e562594.jpg|width=100%]]}}}|| ||<-3><:>손과 일부 관절을 제외한 전신을 거의 감싸는 형태의 호플리테스 갑옷 예시|| 대중매체에 퍼진 이미지 때문에 갑옷은 몸통과 정강이 정도에만 입는 것으로 알려진 경우도 많지만, 사실 갑옷 종류에 따라서는 어깨죽지나 허벅지에 발까지 감싸는 중무장 갑옷도 있었다. 물론 이러한 중갑옷은 재력의 문제가 있다보니 많이 보급되지는 못했다. 호플리테스가 등장한 [[폴리스]] 시대는 [[철기 시대]]였지만 무장 중 [[창]]날과 [[검]]에만 [[철]]을 사용했고, [[갑옷]]과 [[방패]]는 [[청동]]이나 [[황동]]을 주로 사용했다. 초기 철기 시대라서 철기의 성능과 가격 경쟁력이 압도적이지 않았기 때문. 호플리테스 등장 이전 [[청동기 시대]]인 [[미케네]] 문명 대에도 이미 그리스 지역은 전신 청동 중장갑과 대형 방패가 등장하고 있었다. 물론 이 때는 창이나 검도 전부 청동제였고 시민군이 아닌 귀족 전사들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에는 호플리테스의 장비를 줄인 [[경보병]] 에크도로모이(Εκδρόμοι)가 등장했다. 단어의 의미는 '길 위의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이전의 호플리테스들은 전투시에는 보병으로 싸웠지만, 이동할 때는 그래도 [[말]]이나 [[당나귀]] 등 [[용기병|형편이 되는 대로 말을 탔는데]] 이들은 [[알보병|전투시에도 이동시에도 걸어다녔기 때문에]] 약간 비하적인 의미가 들어가있다. 이들은 창과 보조무기인 칼, 투구와 방패만 착용하고 [[팔랑크스]] 대형을 짜고 있다가, 상황에 맞춰 대형에서 이탈해 싸우는 전법을 훈련받은 이들이었다. 전투시에는 [[팔랑크스]]를 짜서 싸웠다. 보통 방패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에 창을 들었으므로 창을 앞으로 내밀고[* 정해진 파지(把指)법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밀집한 상황에서 적들을 강한 힘으로 내려찍기 위해 어깨 위로 올려 드는 방식(Overhand)을 주로 사용했다.] 병사 각자의 방패가 옆에 있는 전우를 보호하도록 횡대형을 짠 후,[* 방패를 정면으로 든다고 생각하면 어차피 자신을 전부 가릴수 있는데 왜 옆사람 방패의 보호를 받는지 의아할 수도 있는데, 이는 방패를 정면으로 드는게 아니라 약간 비스듬하게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체의 우반이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 이 대형을 8열 또는 그 이상 모아서 팔랑크스를 짰다. 제일 오른쪽에 서는 병사는 자신을 가려줄 옆 사람의 방패가 없어 절반만 보호를 받으므로 경험이 많은 병사를 배치하는 게 일반적이었고, 팔랑크스끼리 격돌하면 이 곳을 노려 공격했다. 그러나 [[팔랑크스]]도 단점이 많았는데 일단 대형이 갖추어지면 측면과 후면에서 오는 공격에 매우 취약해지고, 기동성이 떨어져 빠른 방향전환과 전진이 어려웠다. 게다가 전장의 지형이 고르지 않을 때는 창이 흐트러지기 때문에 그 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전투는 쌍방의 대표자가 만나 전장을 정하고, 그 전장에서 정면승부를 벌이는 방식으로 치루어졌다. 전투 시간도 1시간 이내로 짧았고 사상자 수도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전투가 짧았던 것은 아니다. 팔랑크스 진형 특성상 적 진형의 약점인 우측을 공격하기 위해 아군은 좌편향 기동을 해야만 했다. 물론 이건 적도 마찬가지였고, 서로가 옆구리를 파고 들기 위해 하루종일 지리멸렬하게 원을 그리는 경우도 왕왕 있었고, 이런 상황이 생길 경우에는 해가 진 후 전부 집으로 돌아가, 명일에 다시 모여 전투를 치르곤 했다. 사실 전쟁의 양상이 이랬던 것은 초기 도시국가들간의 전쟁은 적 군대를 전멸시키고 상대 도시국가를 점령하는 게 목적인 경우가 거의 없었던 것인데, 굳이 현대식으로 비유하자면 이권을 놓고 다투는 도시국가간의 결투에 가까웠으며 상술한 이유로 상대 군대의 전열을 와해시키는 것만으로도 전투의 승패는 결정났기 때문이다. 다만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게 고대 그리스인들이 특별히 신사적인 방식으로 전쟁을 했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 왜냐면 당시 공성기술이 형편없어서 견고하게 쌓여진 성벽을 갖춘 대도시 같은 경우에는 어지간해서는 정복이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로 공략이 어려웠다. 변변한 공성무기가 없어서 사다리만 들고 싸울 때가 많았고, 공성기술이 좀 뛰어나다는 아테네나 테베쯤 되어야지 공성추를 동원했다. 그나마 효과적인 공성술은 상대 도시를 포위하는 장벽을 밖에 건설하고 보급을 철저하게 차단해서 아사시키는 것이었다. 이렇다보니 일반적으로 전투는 주로 도시를 제외한 변두리 마을이나 국경 요새 등의 지역에서 벌어졌다. 또한 전투 이후에 추격에 게을렀던 것도 다름이 아니라 그럴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죽은 적군의 무구와 소지품은 그대로 승자의 것이 되었고, 포로도 몸값을 받거나 노예로 팔면 엄청난 돈을 받을 수가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수입과 무훈을 떨쳤다는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리스인들은 적 패잔병을 쫒아가서 잡아야 하는 동기가 충분히 있었다. 다만 갑옷을 무겁게 입은 중보병이 죽을 힘을 다해 도망치는 적을 뜀박질로 따라잡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서 별도로 경보병이나 기병을 풀지 않으면 추격이 어려웠다. 특히 산이 많고 평지가 적은 그리스의 지형 특성상 말을 대량으로 키울 목초지가 마땅치 않아서 말의 숫자가 적고 말이 비싸다보니[* 말 한마리의 가격이 그 비싼 호플리테스의 장비보다 훨씬 더 비쌌다. 그러다보니 그리스에서는 말을 가진 사람이 소수의 부유층밖에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부유층은 그리스 군대에서 지휘관이다보니 지휘관들만 말을 타기에 그리스군은 로마와 페르시아처럼 대규모 기병대를 양성할수가 없었다.] 기병을 구비 안한 도시가 많았고, 때문에 그리스군의 병력은 보병이 중심이 되는터라 추격하여 섬멸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전투에서 승리하더라도 추격을 안한 대표적인 나라인 스파르타는 험준한 지형 때문에 기병대가 거의 없다시피한 나라였다. 반면에 기병 수급이 그나마 원할했던 보이오티아 지역이나 시라쿠사는 경보병과 기병을 동원해서 적극적으로 패잔병들을 끈질기게 추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