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호법전쟁 (문단 편집) === 호남과 사천에서의 충돌 === 돤치루이는 군정부를 제압하기 위해 개전준비에 착수했다. 8월 초순, 돤치루이는 심복인 육군부차장 [[푸량쭤]]를 호남독군에 임명했으며 악양으로 북양군대를 남하시켰다. 또한 사천에서는 [[우광신]]을 장강상류총사령 겸 사천사판사로 임명하였고 일본에게 제공받은 차관을 바탕으로 구비를 충족시키고 있었다. 원래 사천성은 [[호국전쟁]]에 앞장섰던 [[차이어]]가 사천독군으로 임명되어 그의 세력 하에 있었는데 차이어는 호국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되어 1916년 11월 젊은 나이에 병사했다. 이에 탕지야오는 사천성을 지배하기 위해 나패금을 사천독군대리로 임명하였으나 사천의 토착 군벌인 류존후가 반발하였다. 이 충돌을 알게 된 [[돤치루이]]는 나패금과 류존후를 모두 면직해버리고 대감을 사천성 성장대리 겸 독군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류존후는 대감이 부임해오자 반발하며 그에게 자리를 내어주려 하지 않았다. 이에 대감은 1917년 전계군벌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탕지야오는 사천을 차지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라 판단하여 대감을 지원하여 사천성에서는 환계, 전계, 사천 토착 군벌이 얽히는 대혼전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탕지야오는 패배하여 사천성에서 축출되었다. 1917년 7월 1일 [[장훈복벽]]이 발생하자 탕지야오는 7월 3일 장쉰을 토벌하겠다는 통전을 보냈다. 7월 12일 장쉰이 토벌되고 7월 14일 돤치루이 내각이 재출범하자 쑨원이 7월 17일 광저우로 남하, [[1차 호법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탕지야오는 이에 호응하며 사천성을 안정시킨다는 구실로 사천성으로 출병했다. 이에 류존후는 북양군벌과 손잡기로 하였고 돤치루이는 류존후를 사천독군, 장란을 사천성장에 임명하여 전계군벌을 저지하게 하였다. 이어 장강 총사령 겸 사천사판사 우광신이 북양군을 이끌고 충칭에 진주하면서 사천성은 북양정부의 지배 하에 놓였다. 그러던 중 광저우 군정부 수립 직후인 1917년 9월 18일, 영릉진수사 유건번과 형양의 호남군 여장 임수매가 돤치루이의 무력통일에 반대하며 자주를 선포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은 자신들을 호법군 호남사령관이라 일컬으며 10월 6일 호법군 호남사령부를 세우고 [[청첸]]을 총사령관으로 추대하여 북양정부와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