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법전쟁 (문단 편집) === 호법전쟁의 끝 === [[1918년]] [[6월 25일]] 결막염에 걸려 고생하던 쑨원은 일본에서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의 중국 개입을 비판하다가 상하이로 귀국했다. 그는 27일 <[[산터우]]의 [[천중밍]] 총사령과 [[장제스]]에게>라는 전문을 보냈다. >장회지가 대군을 이끌고 이미 강서에 도착했다고 하니, 그가 광동을 공격할 우려가 있으며, 북병 2천이 해로로 산터우에 상륙하여 용계를 원조하리라고 한다. [[리허우지]]의 복건 병력도 날로 증가하고 있다. 상황은 이미 지극히 위험한 상태에 있다. 여기서 우리가 모험을 무릅쓰고 진공한다면 살수가 있을 것이고, 모험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앉아서 괴로운 궁지에 몰리게 된다. 공격으로써 스스로를 지키며, 진격으로써 사기를 진작한다면 우리에게 호응하는 자가 많을 것이고, 기적적인 효과가 만드시 생겨날 것이다. 하지만 계속된 내전에 중국 내부에서도 평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1918년 4월 전국상인연합회가 톈진에서 회의를 소집, 정전을 요구했고 교통계의 [[량스이]]도 평화촉진회를 조직하여 평화를 요구했다. 10월에는 장건, 채원배 등의 명사들이 평화를 호소했다. 10월 23일 [[슝시링]], 채원배, 장건이 평화기성회를 발의하였고 이에 직계의 펑궈장이 지지를 보냈다. 주전파였던 [[니쓰충]]도 입장을 전환해 평화를 지지했다. 이들은 11월 3일 성립대회를 개최, 각 지역에서 기성회를 성립하여 1919년 3월 2일 전국평화기성회연합회를 개최하였다. 이외에도 평화통일회, 5족평화합진회 등이 설립되어 평화를 요구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중국 내부에선 전쟁을 그만두고 중국의 국제적 지위 향상에 힘쓸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천춘쉬안은 7월 5일 다시 군정부의 개편을 선언하고 북양정부와 화평을 꾀했다. 북양정부는 7월 28일 톈진에서 3차 독군단 회의를 열어 [[쉬스창]]을 새 총통으로 추대하는데 합의했으나 차오쿤과 장쭤린이 부총통 자리를 다투어 대남작전에 공이 있는 자를 부총통으로 세우기로 합의했다. 독군단은 차오쿤에게 남하하여 공을 세우도록 권했으나 차오쿤은 이미 우페이푸에게 남하하지 말라는 밀전을 받은 후였다. 이에 차오쿤은 3개 조건을 제시했다. * 1. 중앙정부가 모든 군비를 부담하고 무기를 중앙에서 공급할 것. * 2. 사성순열사의 직권을 규정할 것. * 3. 상하이, 덕주, 한양의 병공창의 관리권을 보장할 것. 이는 무리한 조건으로 돤치루이의 거절을 유도하여 남하하지 않으려는 것이 차오쿤의 속셈이었다. 사실 돤치루이가 베이징을 장악한 상태에서 부총통이 되어봐야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장쭤린 역시 동북삼성순열사 자리에 임명되어 동삼성의 군통수권을 확보한 터라 얻을 것을 다 얻었고 일본 제국이 봉천군의 철수를 강력하게 요구하자 전방의 주력이 되어 달라는 군벌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만주의 경쟁자인 길림독군 [[멍언위안]]을 토벌하기 위해 만주로 돌아가버렸다. 1918년 8월 12일 안복국회가 개원했고 9월 4일 쉬스창이 총통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9월 5일 선거는 의원의 정족수 부족으로 부총통 선출이 불가능했다. 이는 환계는 남방을 정벌한 사람에게 부총통 자리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쉬스창은 남방의 인사를 부총통에 앉혀야 한다고 싸웠기 때문이었다. 이 시점에서 우페이푸가 돤치루이 비난 통전을 보냈고 마침 일본에서도 돤치루이를 지원하던 데라우치 내각이 사퇴하고 [[하라 타카시]] 내각이 들어서면서 돤치루이는 힘을 잃었다. 여기에 돤치루이는 국회의원 선거를 위해 매수공작을 한 것이 들통이 나 총리에서 사직해야 했고 이에 따라 북양정부에서는 화평론이 대세가 되었다. 여기에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쉬스창에게 동수의원으로 구성된 남북국회가 동수의원을 파견해 연석회의를 구성하고 남방의 영수를 부총통으로 임명하며 헌법을 개정하여 임시국회와 남북국회를 동시에 해산하고 신헌법에 의거해 신국회를 다시 열 것을 권했다. 10월 23일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지금까지 주전파 돤치루이를 지지하던 일본이었지만 이 상황에서 중국의 내전을 종용하다간 국제적 고립을 초래할 수 있어 중국의 평화를 지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다.]이 5개국 공동으로 남북 쌍방에 화평권고를 보내왔다. 1918년 10월 10일 취임한 새 대총통 쉬스창은 주화파와 화평파의 싸움으로 부총통 선출조차 불가한 상황과 세계 각국의 화평 권고에 주화를 결정, 량스이의 조언에 따라 부총통 자리를 남방에 준다는 조건을 제시하며 1918년 10월 24일 평화령을 선포했다. 이에 [[천춘쉬안]] 등 남방도 호응하여 10월 30일에 동등한 수의 남북 대표가 대등한 회의를 열자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평화기성회가 양측에 정전을 요구했다. 1918년 10월 10일 취임한 쉬스창 총통은 여러 독군들을 소집하여 평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독군단은 남방에서 가혹한 조건을 붙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총통의 방침에 따를 것을 결정, [[11월 16일]] 각군에 정전령을 내렸다. 남방정부는 8월 19일 북양정부의 모든 행위를 승인하지 않을 것이며 9월 4일 안복국회를 부정하고 그들이 총통 선거권한이 없다고 지적하며 10월 8일 쉬스창의 총통 취임에 대해 반대를 표명, 9월 28일 [[장쉰]]의 [[장훈복벽]]으로 무산된 헌법 초안에 대한 제2 독회를 개최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으나 호법국회 내부는 성장의 민선제와 관선제를 두고 민우사와 익우사가 민선제를, 정학회가 관선제를 주장하면서 격렬한 정쟁이 벌어지는 상태였다. 남북화평을 주장하며 쑨원 축출을 주도한 정학회 등에서 의결법정 정족수가 부족하여 호법국회의 선언은 법적 정당성이 없다고 딴지를 걸었다. 결국 군정부는 북방의 정전령에 호응하여 [[11월 22일]] 정전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호법전쟁은 끝나고 남북간의 화의가 열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