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민관 (문단 편집) == 역할과 선출 == 로마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고 15년 후인 기원전 494년 [[성산 사건]] 이후 처음 만들어진 오래된 선출 관직이다. 처음 호민관으로 선출된 사람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집안인, 공화정 중기 이후 로마 공화정기를 대표한 [[노빌레스]] 중 하나인 리키니우스 가문 사람이다. 리키니우스 가문은 [[에트루리아]]계 로마 귀족가문으로, 가문의 역사를 에트루리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어떤 귀족 가문보다도 오래됐던 명문가 중 하나였지만 로마 편입 후 평민에 속했다.]와 루키우스 알비니우스 파테르쿨루스였고 공화정 초창기에는 2명의 정원으로 운영되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 최종적으로는 10명의 정원이 됐다. 민회에서 선출되며 [[평민]] 계급을 대표한다. 오직 평민만이 선출될 수 있었다. 한 번의 선거에 10명이 선출되었고 신체에 대한 신성불가침권을 가지며, [[의회|민회]]를 통해 [[법률]]을 제정할 수 있고, [[원로원]]의 결의에 거부권을 가지는 등 상당히 강력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또 호민관으로 선출되면 다음에 원로원 의원 후보 자격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법무관 선거에 출마할 자격을 얻게 된다.[* 즉, '''귀족이 되어버린다는 얘기'''. 실제로 로마의 귀족은 역사 초기부터 귀족이었던 자들과 이런 루트로 평민에서 귀족으로 올라간 자들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원로원 의원이 발언 전에 했던 인사말인 '''아버지들이여 그리고 신참자들이여'''(요새 표현으로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신참자'를 뜻하는 [[라틴어]] Nobilis에서 [[영어]]의 '귀족'을 뜻하는 Noble이 온 것이다.] 호민관 바로 위의 [[법무관]] 때부터 총독의 직무가 주어졌고 또한 때때로 군사 지휘권까지 행사할 수 있었으므로 호민관의 직위는 상당히 높은 자리였다. 따라서 호민관까지 올라갔다면 입신출세를 어느 정도 이룬 것이나 다름없었다. 호민관이 생기게 된 유래는 다음과 같다. 로마가 아직 도시국가 였던 시절에는 부족제의 전통이 남아있었고 부족장의 후예인 귀족 당주에겐 막강한 권력이 있었으며 부족원 출신 평민들은 귀족들의 비호를 받는 동시에 정치적으로 귀족들을 지지해줬기 때문에 부족원 출신이 아닌 절대 다수의 평민들에게는 당연히 모든 것이 불리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고등교육을 비싼 가정교사가 담당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가난한 평민들이 귀족에게 대항해서 정치적으로 뭔가를 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런 평민들은 수가 많은데다 병역의무자들이라 계속 불만이 쌓이게 두면 전쟁터에서 파업을 하거나 폭동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래서 온건파 귀족들이 평민들을 달래기 위해 평민들의 뜻을 하나로 모아 총체적으로 대변해줄 수있는 신변 불가침의 관직을 신설하겠다고 한 결과가 호민관인 것이다. 물론 뭐든지 미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로마 전설에서는 신성후퇴사건을 통해 한꺼번에 이러한 권한을 얻어낸 것으로 나오지만...[* 즉, 원로원이 알아서 이런 직책을 설치해주는 대인배적인 결정을 했다고 은근히 띄워주었다는 말이다.] 호민관이 평민의 대변인이긴 했으나, 임기를 마치고 나면 사실상 자동으로 원로원 의원이 되어 귀족과 동등한 예우를 받았으므로 대부분의 호민관들은 어차피 임기 끝나면 한솥밥 먹을 귀족들을 그렇게 강경하게 공격하지는 않았으며, 출세에 관심이 없던 강경한 호민관들도 소수 있긴 했지만 이런 호민관들은 귀족들이 부리는 [[정치깡패]]에게 맞아죽거나 아예 사법살인을 당하는 등 한계가 명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