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떡 (문단 편집) == 역사 == 옛 [[서역]]인들이 먹던 음식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호떡의 '호'자가 '[[오랑캐]] 호(胡)'자이며 오랑캐가 먹던 떡이라는 주장이다.[* 호주머니, [[호두]], 호부추, 후추와 같은 맥락이다.] [[고려]]시대 벽란도를 드나들던 아랍인이 먹던 주식을 회회(回回)떡이라 했는데 이것이 호떡으로 변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참고로 [[몽골]]에서도 호떡과 비슷하게 생긴 음식을 먹기는 한다. 다만 주로 식사용으로 먹는 경우가 많다. 과거 [[동아시아]]에서는 [[중앙아시아]], [[인도]], [[아랍]] 등지의 지역을 서역(西域), 이 곳 사람들을 호인(胡人)이라고 불렀는데 [[한나라]]에서 서역과 왕래하며 들어온 빵음식을 호병(胡餠)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후 [[밀가루]]가 보급되면서 중국 북부에서는 제법 흔하게 먹는 음식이 되었는데, 한국에서처럼 달달하게 먹기도 하지만 고기나 야채를 넣어서 간단한 한끼식사로 먹기도 하며, 모옌의 작품 등 중국의 여러 문학작품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고, [[차이나타운]]에서 이러한 식사용 호떡을 고기호떡으로 팔기도 한다. 이 음식이 정확히 언제 우리나라로 들어왔는 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882년 [[임오군란]] 수습 때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라는 불평등조약을 통해 [[청나라]] [[화교]] 상인들과 함께 들어온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으며,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로 이르기까지 가난한 화교상인들이 흔히 할수있는 장사가 호떡이었기도 했다. [[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61431&bbsId=BBSMSTR_1008&mn=NS_01_09_01|출처: 문화재청, 실크로드를 통해 전해진 서역의 음식 - 호떡]] 이것 때문에 유래된 '''호떡집에 불났다'''라는 [[속담]]이 있다. 보통 어수선하고 시끄럽다, 혹은 사람이 많아 가게에 장사가 잘 되다. 란 의미다. 말 그대로 과거 호떡집들은 장사가 잘 되어서 사람이 바글바글했기 때문에 이 말이 아직까지 이어져 온 것. 그 외 불구경하듯 바깥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구경한다는 의미도 있다. 이건 해묵은 [[혐중]] 감정의 근원인 1930년대 [[일제강점기 화교배척폭동]]이 원인이었다. 제분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밀가루가 귀하고 사탕수수나 사탕무를 재배하지 않아 설탕이 부족했던 한반도에서 화교 상인들이 중국에서 수입해온 밀과 설탕은 사실상 중국 상인들만 취급하던 고급 식재료였고, 중국인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일할때 근처에 세운 노점에서 구운 호떡은 한국인들에게 별미이자 선물감이었다. 국밥이 15전, 20전 할 때 호떡 한장이 5전이니 당시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저리가라 할만한 사치품이었던 셈. 그런 귀한 별미를 독점해 돈을 긁어가는 화교 장사꾼을 보는 심정이 당연히 좋았을리가 없고, 기름을 많이 쓰는지라 화재가 잦은 호떡 노점에 불나는 일은 그야말로 남의 일이자 속으로는 신나는 불구경인 것이다. 게다가 평상시에도 시끄러운 중국인들이 불이 나면 얼마나 시끄러운지 저절로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당연히 이들을 관리하기 보다는 갈등을 부추겨 디바이드 앤 룰을 하려고 하니 그 때 부터 조선인과 중국인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짱깨]]가 중국인 비하명칭이 되듯 호떡집에 불나면 구경하기 바빴던 것이다.[* 중편 소설 [[태평천하]]의 주인공 윤 직원 영감이 브로커와 대화를 나누다 [[중일전쟁]]이 화제로 나오자, 윤 직원 영감이 중국에 대해 "아―니 글씨, 좋게 '''호떡'''장수나 히여 먹구 인죄견([[인견|인조견]])장수나 히여 먹을 일이지, 어디라구 글씨 (일본에) 덤비냔 말이여!"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중국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가 '호떡'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에서 살던 일본인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챵빵(チャンパン)으로 불렀는데, 이는 일본어로 중국인을 속칭하던 챵(チャン)에 빵이 붙은 것으로, 호떡의 어원과 유사하다. 그들은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도 식민지에서 먹었던 챵빵의 맛이 그립다고 회고하는 경우를 여러 회고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점차 세월이 흐르고 현재는 한국식으로 [[로컬라이징]] 되어 다양한 종류의 호떡 문화를 개발하며 이어지고 있다. 상술한 1930년대 호떡 붐은 40년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물자수탈이 심해지자 아예 자취를 감추고, [[미국]]이 원조한 [[밀가루]]와 [[설탕]]이 들어오면서 한국인들이 조리과정이 복잡했던 과거 호떡을 단순화하여 변형시킨 것이다. 과거의 화교식 호떡은 지금 알고 있는 호떡이 아니라 페스트리처럼 겹겹이 층을 만들어 굽는 식으로 [[이마트]]가 [[대만]]에서 수입한 피코크 계피호떡이 당시 레시피와 가까운 화교식 호떡이다.[* 이런 호떡은 대림역 근처의 화교식당에서도 많이 볼 수 있으며 중국식 호떡으로 부르기에는 공갈빵을 떠올릴 수 있기에 음식 이름을 스위트 페스트리로 바꾼 가게도 보인다. 또한 내용물도 녹은 설탕대신 녹다가 다시 굳어진 설탕이 씹히는 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