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혜종(고려) (문단 편집) === 탄생 설화 === [[조선]] [[세종(조선)|세종대왕]] 때에 저술된 《[[고려사]]》에 따르면 어머니 오씨는 <'''시냇가 빨래터''' 설화>의 시초가 된 인물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왕건이 [[나주]]를 점령한 뒤 한 시냇가를 지나게 되었는데 마침 오씨가 그 곳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뒤에는 [[무지개]]가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우연히 보게 된 오씨가 맘에 든 왕건은 그날 밤 그녀와 [[동침]]하였다. 그러나 미천한 신분의 오씨를 [[임신]]시키지 않기 위해 왕건은 깔고 누운 돗자리에 [[질외사정]]을 하였다. 하지만 왕건의 됨됨이를 살폈던 오씨는 그가 [[돗자리]] 위에 사정한 [[정액(체액)|정액]]을 손으로 쓸어 모아 그것을 자신의 [[질]]에 넣었다. 그렇게 해서 낳은 아들이 바로 혜종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야사]]가 아닌, 물론 조선 사관의 기준이지만 그래도 비교적 객관성을 지향했음을 보이려는 정사 《[[고려사]]》에 엄연히 기록된 일화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이런 식으로 임신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가능성이 0%는 아니지만 이런식으로 임신되기는 매우 어렵다. 정상적으로 질 내부에 삽입하여 나름 높은 압력으로 사정을 해도 여성 질 내부의 보호 시스템 때문에 정자들이 난자가 있는 나팔관까지 살아 들어가는 확률은 매우 낮다. 실제로 남녀 모두 문제가 없음에도 쉬이 아기가 생기지 않는 부부를 보면 이런 과정에서 정자가 미리 다 죽어버리는 경우가 꽤 있다. 그런데 돗자리에 흘린 정액을 질안에 넣어서 임신을 하기란... 차라리 이쪽보다는 성관계 중 나온 쿠퍼액에 의한 임신이 좀 더 유력한데 이것도 이론상으로는 가능해도 실제 사례는 매우 적다. 이런 일을 왕건 본인이나 오씨 부인이 다른 사람에게 얘기했을 가능성도 지극히 낮기 때문에 혜종의 [[정통성]]을 깎아내리려는 목적으로 서술된 이야기로 강하게 추측되고 있다. 왕건과 오씨 부인을 제외한 그 누구도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알 리는 없을 텐데 이러한 일화가 조선 세종대왕 시대에 활동하던 학자들이 《고려사》를 편찬할 때 저본으로 삼았던 사료에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고려 시대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입에서 입을 통해 주변에 널리 퍼져 있던 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혜종 사후 이복동생 [[정종(고려 3대)|정종]]이 즉위하자 일어난 '왕규의 난'이 《고려사》에서 볼 수 있는 승자에 의해 [[왜곡]]된 대표적인 사례들 중 하나로 언급되는 걸 보면 혜종의 정통성을 깎아내리는 목적에서 이뤄진 서술로 볼 개연성이 매우 높다. 당시 고려 왕실의 권력 다툼은 꽤 치열했다. 제4대 [[광종(고려)|광종]]은 동복 형제 정종의 아들, 즉 자신의 친조카인 경춘원군을 처형시켰는데 이때 이복 형제인 혜종의 아들이었던 흥화궁군도 함께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으로 미루어 봐도 결과론적으로 형제 상속이지만 원칙은 태조 왕건으로부터 시작된 장자 승계라는 걸 알 수 있으니 정종과 광종의 왕위 계승 정통성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어쨌든 중요한 점은, 이러한 설화가 사실이었는지 아니었는지가 역사라기보다는 이러한 이야기가 회자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갖가지 배경을 포함한 역사라는 점이다. 이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배경은, * 첫째, 아무도 혜종의 혈통을 의심하지는 않았다는 것. 저 설화가 만약 사실이라면 왕건은 출신이 천한 오씨와 자식을 만들 생각이 없었는데 오씨 혼자 몰래 수를 썼다는 얘기다. 그랬다면 훗날 오씨가 아이를 낳았어도 왕건은 확신이 없었을 것이고 쟁쟁한 호족들이 포진한 왕실은 "웬 듣보잡 계집이 임금을 우롱한다."고 우기고 그 아들을 무시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왕건은 혜종을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왕위계승자인 정윤으로 세우고 이후 승하할 때까지 단 한번도 이를 바꾸지 않았다. 또한 왕건의 29명의 아내 중 셋 밖에 없는 왕후에 오씨가 두 번째로 포함된다. 이것은 왕건이 정말로 오씨와 자식을 얻기 위해서 동침했고, 마땅히 오씨도 자기 아내, 그것도 격이 높은 부인으로 여겼어야 맞아떨어진다. 그러니 오씨의 아들을 당연히 자신의 정통성 있는 맏아들로 여기고 많은 아들이 더 있음에도 혜종을 태자에 앉힌 것이다. * 둘째, 아무도 혜종을 이런 이유로 욕하지 않았다. 실제로 저런 일이 있었다면 오씨의 행위는 수군거림의 대상으로는 충분하고, 그렇기에 아들인 혜종에 대해서도 "저런 엄마의 아들이 다르겠어?"라고 재위 전후 두고두고 욕을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는 이런 정황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즉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 이에 대한 기록이 딱히 없다는 건 저 설화가 정종 혹은 광종 등 후대가 혜종의 정통성을 폄하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뒤늦게 만들어낸 동떨어진 이야기, 아마도 어머니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했을 뿐 정통성엔 아무런 문제 없는 왕위계승자였다는 방증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설화엔 태몽이 [[용]]꿈이었기 때문에, 물을 좋아하는 용의 성격을 참조하여 수태기를 느낀 오씨 부인은 잠자리 곁에 한 바가지의 물을 떠 놓고 항상 손을 적신 채 잤다고도 전해진다. 반면 왕건이 돗자리에 사정한 정액을 오씨가 자신의 몸에 주워넣음으로써 그를 수태하였으므로, 혜종의 얼굴은 돗자리처럼 자글자글하게 주름살이 져서 '주름살 대왕' 혹은 '주름살 [[폐하]]'가 그의 별칭이었다고 한다. 돗자리 특히 화문석을 '왕골자리'라고도 부르는데 이로부터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용이라는 왕을 상징하는 태몽, 무력이 뛰어나다는 평가의 반면에도 감히 왕에 대한 용모 평가를 그렇게 자세하고 모욕적으로 퍼뜨리는 건 왕을 우습게 보는 세력이 작위적으로 개입했을 정황이 보인다. 세종대왕은 '''분영갱상'''(焚影坑像), 즉 전국 각지에 있었던 고려 역대 군주들의 어진과 조각상들을 불에 태우거나 땅에 묻으며 고려 왕조를 지워버리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했던 군주다. 그런 세종대왕이 《[[고려사]]》(高麗史)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고려 왕들의 일화들 중에 민망한 내용들이 너무 많자 비록 전 왕조이지만 왕조의 위신이 너무 깎인다고 여겨 민망한 내용들은 삭제를 명했다. 고려는 남녀 혼탕이 자연스러웠을 정도로 조선에 비해 성적으로 꽤나 개방적인 나라였다. 그래서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는 민망하고 감추어야 할 만한 내용들이 버젓이 기록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유독 혜종의 경우,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의 민망한 내용을 남겨둔 것은 훗날 혜종이 불천지주에 오르며 고려 왕조의 왕통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과 마치 '무(武)'가 고려 왕조의 전유물인 것처럼 이 글자를 피휘하는 왕이므로 훗날에도 어느 정도 폄훼하려 했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세종대왕은 '분영갱상'을 일으키면서 이안관 장득수(張得修)를 전라도 나주로 보내 사당에 모셔져 있던 혜종의 어진과 소상을 옥교자에 모시고 개경으로 가져가 땅에 묻었다. 즉 혜종은 저런 설이 나돌았음에도, 혹은 '나돌아야만' 했을 정도로 상당히 중요도 높은 왕이었다. * 셋째, 혜종의 탄생 설화가 이 지경이 된 데는 혜종의 후손이 결국 왕통을 잇지 못한 사실 외에도 외가인 나주 오씨, 그 외 혜종의 처가와 인척, 가까운 비호 세력들이 그 후로도 별 힘을 못 썼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나주 오씨 세력이 약해진 이유는 후삼국 시기에 이미 왕건 쪽에 섰다가 견훤의 금성 침략 때 상당한 손실을 입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역설적으로 지리상 가까웠던 견훤보다도 왕건을 변함없이 지지하고 전력을 다해 저항한 가문이었을 수 있으며 이 또한 왕건이 혜종을 정윤으로 삼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나주 공략의 성공은 궁예 정권에서 왕건의 최대업적으로 꼽히며 그를 빠르게 출세시켜준 요인이고, 궁예가 폭정을 시작했을때도 중앙 정계를 떠나 나주로 피신을 가 위기를 피하기도 하는등 왕건에게 나주는 아주 각별한 곳일 수 밖에 없었다. 오씨 가문의 역할과 희생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정황상 왕건은 오씨 가문에게 매우 큰 빚을 졌을 가능성이 높기에, 혜종의 왕권이 불안정할 가능성을 감수하고서라도 혜종에게 승계를 해줄 이유 중 하나로 충분하다. 물론 제일 큰 이유는 혜종이 왕건의 "흠결 없는 적장자"란 것이다. 혜종이 출생 설화부터 모욕을 당했음에도 딱히 혜종 개인의 능력과 인품에 대한 음해 기록은 없는걸로 봐선 왕으로써의 자질이 준수한 수준은 넘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오씨 가문이 왕건이 왕이 되는데에 기여한 역할도 크다면, 단지 다른 처가들의 힘이 더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혜종을 폐태자 시키는건 왕건 입장에서 선택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