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혜종(고려) (문단 편집) == 묘호와 시호 == 공식 묘호는 '''혜종(惠宗)'''[* 이복 동생인 [[광종(고려)|광종]]이 올림.]이다. 혜종은 [[태조(고려)|태조]]의 공인 후계자란 나름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제6대 [[성종(고려)|성종]] 대에 고려 왕실의 태묘(太廟)를 건설했는데, 이 때 왕조를 세운 태조는 기본적으로 불천위에 모셔졌고, 태조 이외에도 왕조의 멸망을 막거나 흥성(興盛)을 가져오는 등 왕조에 크나큰 공(功)과 덕(德)이 있는 임금들의 경우에는 종묘에서 옮기지 않고 계속 제사를 지내는 불천위에 올랐다. 성종이 5묘제를 시행하였지만 여러 변화를 거치며 기틀을 갖추기 시작한 건 세월이 흐른 후였다. 중국의 경우도 건국 초기에는 7묘를 채우지 못하였다. 제16대 예종 대에 이르러서도 '불천지주'(不遷之主)는 원래 모셔진 태조 한 분뿐으로, 혜종은 태조를 도와 고려를 세운 분이자 태조로부터 직접 왕위를 물려받은 후계자로서 실질적인 불천지주로 태묘에 모셔지고 있었는데, 제17대 [[인종(고려)|인종]]이 자신의 아버지인 예종을 태묘에 모시기 위해 혜종을 [[태묘]]로부터 옮기는 일이 발생했다. 신하들은 혜종이 민(民)에 대한 공덕이 있으므로 백성들이 슬퍼할 것이라며 이는 예법에도 어긋난다고 반대했다. 인종이 굳이 반대를 무릅쓰고 아버지 예종을 위해서 혜종의 신위를 옮긴 이유는 다음과 같다. 5묘제는 '태조+2소+2목'이라는 복잡한 체계를 바탕으로 했다. 그런데 혜종을 천묘하지 않고, 인종의 직계가 아닌 [[덕종(고려)|덕종]], [[정종(고려 10대)|정종]], [[순종(고려)|순종]], [[선종(고려)|선종]] 등을 천묘하면 '3소+2목'이 되었다. 따라서 혜종을 천묘하여 2소+2목을 맞추려 했던 것이다. 즉 불천지주로 인식되던 혜종을 천묘한 것은 5묘 9실제를 고수하려 했기 때문이다. 다시 제18대 [[의종(고려)|의종]] 대에 이르러 불천지주로서 혜종의 신주가 태묘에 부묘되니, 태조, 혜종, [[현종(고려)|현종]]을 불천지주(不遷之主)로 삼고, [[문종(고려)|문종]], 순종, 선종, [[숙종(고려)|숙종]], [[예종(고려)|예종]], [[인종(고려)|인종]]을 모셔 '7묘 9실제'로 개정했다. 의종이 개정한 7묘 9실제는 제21대 [[희종(고려)|희종]] 대를 거쳐 제23대 [[고종(고려)|고종]] 대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희종(고려)|희종]] 대에도 혜종과 [[현종(고려)|현종]]의 신위에 대하여 논의가 펼쳐졌다. 혜종은 태조의 정윤으로서, 현종은 중흥군주로서 모두 지위가 높았기 때문에 결국 희종은 혜종, 현종을 [[문제(전한)|전한 태종]], [[무제(전한)|전한 세종]]에 비유해 모두 [[불천위]]로 공인했다. 그래서 고종 41년 [[고려궁지|강도]]서 태묘 제사를 지낼 때 올린 <책문>엔 혜종을 ''''태종대왕''''(太宗大王)이라 칭했다. 혜종대왕의 시호는: * '''《고려사》 <혜종 세가> -총서-:''' 인덕명효선현의공대왕(仁德明孝宣顯義恭大王) * '''《고려사》 <혜종 세가> 마지막 조:''' 경헌고평선현명효의공대왕(景憲高平宣顯明孝義恭大王) 혜종의 대표 시호는 동생 [[정종(고려 3대)|정종]]이 올린 ''''의공대왕''''(義恭大王)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