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혜종(고려) (문단 편집) == [[태묘]] 악장 및 추시문 == 고려 성종이 태묘를 만든 뒤, 태묘에 배향된 제왕들에게 바치는 <악장>, 즉 칭송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예종 11년에 예종 기준 9묘(九廟)의 제왕에게 새로 바친 노래가 《고려사》 <악지>에 남아 있다. 예종 대 혜종 왕무의 찬가 제목은 '''<소성>'''(紹聖)이다. 네글자 운구이다. >그 선왕(先王)을 살피어 보니 당시에 매우 당당하셨습니다. >흉잔(兇殘)을 부수고 없애시니 삼한(三韓)이 안정되었습니다. >매우 높으시니 성덕(成德)을 크게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자손이 제사를 지내 망극한 성덕을 보답하고자 합니다. > >용기와 지혜가 걸출하시니 태조(祖)를 도와 공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위대한 깃발 아래 삼한이 통솔되었습니다. >그 상서로움이 오래 이어지니 열성(列聖)을 비추고 있습니다. >시기에 맞춰 엄숙히 제사지내는 것이 효손(孝孫)의 경사입니다. 공민왕 12년 새로 <악장>을 만들었다. 제목은 없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만들었습니다. 누가 조천하지 않겠습니까? >태조를 좌우에서 보조하니 활과 살을 가지고 병영을 경영하셨습니다. >거대한 덕이 태묘에 잠들었으니 영령(英靈)이 그를 따릅니다. >당신께선 도우시고 진을 치시고 문을 열고 거대하셨으니 영원히 황명(皇明)[* 황제의 빛, 밝음.]을 바라보겠습니다. 인종 재위 18년([[1140년]]) 4월, [[묘청의 난]]을 제압한 인종은 혜종과 의화왕후, 덕종과 경성왕후, 정종[* 고려 3대 [[정종(고려 3대)|정종]](定宗)이 아닌 10대 [[정종(고려 10대)|정종]](靖宗)]과 용신왕후에게 시호를 추가로 올렸다. 태묘에서 제사지내며 올린 축문이다.《동문선》 제28권에 기록되어 있다. >엎드려 100세 동안 끝없이 제사지내는 것은 성덕에 보답하는 것이며 3년상을 치루는 것은 제사의 상례를 다하는 것입니다. 점을 처 맹동(孟冬)에 기일을 정하여 청묘(淸廟)[* [[태묘]]의 다른 말.]에 아룁니다. 때에 맞춰 물품을 바치는 것은 성의를 다하는 것이며 글을 남겨 기록하는 것은 공덕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 >공손히 생간컨데 혜종 의공대왕(惠宗 義恭大王)께선 불세출의 지략을 가지시고 늘 정도를 걸으셨습니다. 신성(神聖)[* 태조 신성대왕의 시호.]께서 개국하셨을 때는 간악한 자가 맘대로 돌아다니던 나날이었습니다. 이에 사극(四克)을 정벌하시고 민구(民區)를 크게 구하셨습니다. 끝없이 보좌하시니 드디어 홍업(鴻業)을 이루어냈습니다. > >후 말명(末命)[* 태조 신성왕의 마지막 명령.]에 따라 비도(丕圖)를 밝게 이으시니 호걸(豪傑)들을 부려 사방(四方)[* [[천하]]의 다른 말.]을 수호하셨습니다. 무공(武功)이 저 멀리까지 이롭게 하니 만국(萬國)이 차를 끌고 와 문화의 대동(文化大同)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대왕의 업적을 받드는 것이 후손의 의식이 되었습니다. > >[[의화왕후]](義和王后) 임씨(林氏)께선 부드럽고 명철한 성격을 지녔습니다. 보좌의 마음을 가지시니 6궁과 3대를 뒤덮고 사해(四海)[* [[천하]]의 다른 말.]에 풍속을 가르치고 왕화(王化)를 2남에까지 덮게 하였습니다. > >비록 진구(眞馭)는 이미 멀리 떠났지만, 부드러운 위엄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신(臣)[* 인종의 자칭이다.]은 작고 소심합니다. 경공히 위엄을 받들어 제사를 모시니 모든 경사가 모여듭니다. 두 글자로 된 시호를 바치니 천년동안 이어질 영광스런 칭호를 더합니다. > >성실히 某 물품을 바치며 대왕존시(大王尊謚) 某와 왕후존시(王后尊謚) 某를 더해 올립니다. 부디 들어주시길 바라며 엎드려 뜻을 이어받길 기대합니다. 책문을 받으시고 우리 자손을 지켜주시옵소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