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현진건 (문단 편집) === 말년 === 일제 말기 현진건의 삶은 비참한 모습 그 자체였다. 당시 일제를 위한 작품을 쓰지 않으면 취직이나 생계를 이어간다는 게 거의 불가능했던 시기였다. 그런 시대임에도 현진건은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한 채 가난에 찌들어 살면서 문학인으로서의 지조를 지키면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1939년 동아일보사에 복직하여 학예부 부장을 지내면서 장편소설 <[[흑치상지]]>를 연재했으나, 내용이 사상적으로 불온하다는 일제의 강압으로 연재가 중단되었고, 끝내 미완성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1940년에는 양계업 경영의 실패로 인해 부암동 자택을 팔고 경성부 [[신설동|신설정]](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신설동]])으로 이사했다가, 1942년 다시 [[제기동|제기정]](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으로 이사하고 어려운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1943년 4월 25일 자택에서 지병인 [[폐결핵]]과 [[결핵|장결핵]]으로 별세했다. 평소 그는 과음하는 것이 버릇이었는데, 1932년 형 [[현정건]]이 별세한 뒤 형을 추모하기 위해 <흑치상지>를 연재하려고 했던 것이 일제의 방해로 제지당했고, 이에 상심하여 이전보다 더욱 심한 폭음을 일삼은 것이 결국 지병을 악화시킨 것이다. 현진건의 이런 삶의 태도는 친일 문학가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광복 후에도 그게 뭐가 잘못이냐며 뻔뻔한 모습을 보인 [[김동인]]이나 [[주요한]]과 대조된다. 그 밖에 먹고 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친일 활동을 했던 [[이효석]]이나 [[채만식]]도 있긴 한데 그나마 이들은 이걸 후회하고 죄의식을 느꼈다.[* 이효석은 "조선 총독부에 근무하면서 호강을 부리던 놈이 객기로 그만둔 것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나, 먹고 살고자 다시 왜놈에게 아첨을 하는 글을 쓰는 건 두고두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오."라고 지인들에게 토로했다는 증언이 있고, 채만식은 해방 이후에 [[민족의 죄인]]이라는 중편을 써서 자신의 친일 행적을 고백했다.] 음악가 [[홍난파]]도 [[흥사단]]가를 작곡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잡혀 복역했고, 결국 석방된 후 친일 활동을 하긴 했다. 유언에 따라 [[화장(장례)|화장]]되고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서초리(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에 매장되었으나 그 후 남서울 개발관계로 묘소가 사라져 유해는 한강에 뿌려졌다. 현진건은 친일행각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굳이 들추자면 1940년 『춘추』라는 잡지에 소설 「선화공주」를 연재했는데 이 잡지가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된 [[양재하]]가 만든 잡지였다. 다만 4월 호부터 쓰기 시작했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9월 호에서 중단했고,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걸 읽어봐도 딱히 반민족적이거나 일제의 군국주의 정책을 찬양하는 내용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어서 이걸 친일이라고 몰기도 민망하다.], 사생활도 깨끗했다. 이광수 이래 일제강점기의 문인들이 기생끼고 살거나, 두 집 살림은 기본적으로 벌인 사람이 태반인데 현진건은 아내에게만 충실했다. 현진건보다 두살 많은 금술좋던 아내 이순득은 현진건이 죽자 슬픔에 빠졌고 현진건이 죽고 1년만에 남편을 따라 죽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