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현진건 (문단 편집) === 청년기 === 귀국 후 극작가인 7촌 재종숙(再從叔) 현희운(玄僖運)[* 예명 현철(玄哲).]의 추천으로 개벽 5호에 "희생화"를 게재하여 문단에 등단했지만, 현진건 본인이 "희생화"를 습작으로 간주하여 일반적으로 현진건의 첫 작품은 동지 7호에 오른 "빈처"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물론 현진건 본인은 희생화를 처음 기고할 때는 [[투르게네프]]의 작품에도 은근히 비길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며 내심 기뻐했지만, 문학평론가 황석우(黃錫禹)는 희생화를 두고 "이건 소설도 뭣도 아니고, 작자가 뭘 쓰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설도 아니고 독백도 아닌 것이 뭔가 예술적 형식을 갖추지 못한 일개 무명의 산문이다."라고 아주 철저하게 밟아버렸고, 현진건은 '당장에 황석우라는 놈을 찾아가서 때려죽여도 분이 풀릴 것 같지 않았'을 정도로 분개했고 다시 "당신이 일개 무명의 산문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소설은 [[투르게네프]]도 이미 몇 편을 썼다"고 항의했지만,(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작품 "희생화"가 소설의 형식을 갖추지 못한 무명 산문이라는 황석우의 비판에 대해 '이 글이 소설이 아니고 무명 산문이면 내가 문학의 신영역을 개척했다는 이야기이니 과찬인데, 사실 이런 글은 투르게네프도 쓴 적 있다'는 식의 비꼬기였다) 시간이 흐른 이후 몇 편 글을 더 쓰면서 작가로써의 경륜이 조금 쌓인 뒤에 다시 희생화를 읽어보고서 '이제와서 보니 좀 부끄럽긴 하더라'(...그냥 좀 부족하더라도 아니고, 이제 다시 읽으니 진짜 소설의 형식을 못 갖춘 무명 산문이라고 겸허하게 인정했다!)고 인정했다. 참고로 현진건이 희생화를 발표했을 때의 나이는 20살이었다.] "빈처"가 [[염상섭]]의 극찬을 받으면서 현진건은 문학 동인 "[[백조#잡지|백조]]"에 들어가게 되어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등의 사실주의적 소설들을 잇달아 발표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1921년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언론인의 길을 걷게 된다. 1924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있다가 1927년 퇴시하고 [[동아일보]]에 입사하였다. 이때 [[고양군]] [[은평구|은평면]] 부암리(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종로구)|부암동]])로 이주하였고, 동아일보에서는 1936년까지 사회부 부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36 베를린 올림픽]] 때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 말소사건|일장기를 삭제한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년 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출옥 후에는 [[동아일보]]를 퇴사하고 양계업을 경영하면서 역사소설 <[[무영탑]]>을 저술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