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현종(당) (문단 편집) == 평가 == >개원 연간에는 천명을 받들고 천하를 얻어, 옛일을 오랫동안 교훈으로 삼았다. 경사스러운 기운이 화통하고 밝았으며, 침울한 분위기가 정리되었다. 정치에 조금씩 권태를 느꼈고, 요사스러운 이들이 조정으로 모여들어 관직을 맡았다. 선철들의 말로 ‘처음에는 누구나 잘한다.’고 이야기한다. >---- > 《[[구당서]]》, 현종 논찬 >현종은 직접 난을 평정하여[* [[당륭정변]] 및 [[선천정변]]] 가히 귀감이 되었고 또한 여자들을 무너뜨렸다('''무위지화'''의 종식). 바야흐로 정사에 정신을 가다듬어, 개원 연간에는 어느 정도 태평에 이르렀으니('''개원성세'''), 얼마나 위대한가! 사치에 자극을 받자, 천하의 욕망을 궁구하여도 즐길 거리로 삼기에는 부족하였으니, [[양귀비|두터운 사랑]]에 빠지고 경계함을 잊어버려('''천보난치'''), 몸을 숨기고 나라를 잃기에 이르렀지만('''안사의 대란''') 뉘우치지 않았다. 그 처음과 끝이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습성이 서로 멀리 갔다는 것이 이와 같았다. 가히 삼가지 않았구나! 가히 삼가지 않았구나! >---- > 《[[신당서]]》, 현종 논찬 > “그 나라의 바로 전 임금인 당명황[* 송대 이후의 중국에서는 묘호가 아닌 시호를 따온 '''당명황'''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린다. 이는 송태조 조광윤, 송태종 조광의 형제의 시조인 [[조현랑]]이 황제로 추존되어 '현' 자가 [[피휘]]되었기 때문이다.]만 하더라도 [[양귀비]]란 계집에게 미쳐서 정사를 다스리지 않은 탓에 필경 [[안사의 난|안녹산의 난]]을 빚어 내어 오랑캐의 말굽 아래 그네들의 자랑하는 장안이 쑥밭을 이루고 천자란 빈 이름 뿐, [[촉나라]]란 두메 속에 오륙 년을 갇히어 있지 않았는가. > ---- > [[현진건]], 《무영탑》 中 '''[[개원의 치|개원성세]]라는 전성기를 이끌면서 여러 국가들을 정복하여 대당제국의 영토를 팽창시키고, [[중앙아시아]]까지 영향력을 확대함'''과 동시에 '''[[안사의 난]]이라는 거대한 내전을 발발하게 하여 제국의 몰락까지도 초래한 황제'''라서 '''여러모로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곤 한다.''' 역시 인생은 말년까지 자기 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체현한 황제였다. [[양귀비]]와의 로맨스는 거의 그를 상징하는 요소이며 그와 관련한 많은 이야기거리와 전설을 남기기도 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g.360640.com/451.png|width=100%]]}}} || 다만 여기서 주의할 것은 현종이 [[양귀비]]와 놀아나다가 대제국을 말아먹었다는 평가인데, 이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나친 도덕적 역사관이기도 하지만, 사실과는 좀 다르다. 재위 후기의 현종에게서 [[암군]]의 모습이 보인다는 점은 잘 따져보면 정치적인 영역에 가깝다. 실제로는 바닥까지 몰락했던 [[관롱집단|관롱 귀족 집단]]이 완전히 정국을 장악하여 국정을 전횡하는 것을 다름 아닌 그가 방관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래서 현종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군제와 경제 개혁을 몇 차례 시도했지만 이에 반대하는 군인과 귀족들이 정국을 장악했는데 그게 과연 먹히겠는가. 오히려 그들은 현종의 개혁에 강하게 반발하며 저지에 나섰고 개혁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태에서 자신에게 간언하는 과거제 출신 관료들에게 거부감을 느끼면서 정치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고, 이는 현종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하기 시작한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변화들을 학자들이 상징적으로 평가한 것이 '[[양귀비]]와 놀아나면서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말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간신 [[이임보]]의 사후 양국충이 집권하면서 이들 관롱 귀족 세력은 다시 힘을 크게 상실하게 되었다. 양국충은 가문이 빈천한 과거 급제자 출신들을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삼아 이들을 적극적으로 채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과거 출신 관료들이 외척인 양국충의 지원으로 기용되었다는 게 약점이 되었기에 양씨 가문의 전횡을 막지 못했다. 게다가 [[개원지치]] 즈음에 군진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절도사 제도의 문제가 심각해졌다. 사실 '''막대한 수의 [[직업군인]]을 지방의 군사 지휘자가 단독으로 통솔하여''' [[군벌]]이 되기 쉬운 태생적 단점을 가진 절도사 제도는 엄중한 통제가 필요한 제도였으나, 천보 시대부터 관리가 극도로 소홀해진 것이 문제였다. 즉 이 시기부터 [[당나라]]는 '중앙집권적인 제국'이 아니라 완전히 '''분권적 봉건제 제국'''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즉 [[절도사]]는 자신의 영지내에서 독자적인 군대를 이끌고 군주처럼 왕 노릇을 하는 군사조직이 되었다. 이처럼 엄청나게 양성된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직업군인들은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팽창시키다가 나중에 가면 교만해져 중앙 정치까지 개입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대규모 내전을 일삼게 된다. 군사제도를 '[[직업군인]] 제도'인 [[모병제]]로 완전히 바꾸고, 당나라의 군사력을 강력하게 증강시키면서 영토팽창주의를 고수하여, [[고선지]]가 72개가 넘는 국가들을 정복하고 아시아 전체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시에 태종 시대에 최전성기를 달리면서 세계 1위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당나라의 군사력이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는 것까진 좋았는데 정작 현종은 이렇게 하늘을 찌르듯 강력해진 군사력을 제대로 통제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니 힘이 막강해진 군인들과 절도사들이 더 이상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걸핏하면 중앙 조정에 반항하며 내전을 일으키거나 황제의 명령없이 독단적으로 자신의 개인 군대를 이끌고 타국을 정복하러 나가는 등 완전히 [[병영국가]]화가 되어갔다. 대표적인 [[안녹산]]의 경우, 평로절도사로 14년, 범양절도사로 12년, 하동절도사로 5년을 재임했고, '''이들 셋을 겸임하는 상태'''로 있었는데, '''절도사의 원래 정해진 임기가 2년'''이란 점을 생각하면 이건 월권 행위에다가 절도사들의 군사력이 너무나 막강해져서 더 이상의 관리가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심지어 [[안사의 난]]이 발발했을 때도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안녹산이 통제하던 정규 병력만 해도 당시 당나라의 지방 절도사들이 관리하던 총병력 중 37.8%였으며 수만 명에 달하는 사병까지 확보하고 있었기에 군벌에다 통제 불능의 세력이 되었다. 결국 이런 거대한 병력을 통제하고 있었던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동시에 거대한 제국 전역에서 대규모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던 수많은 절도사들까지 너도 나도 할 것없이 반란을 일으키다보니 제국 전체를 휩쓰는 거대한 내전으로 흘러가면서 대책이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었고, 결국 세계제국이었던 당나라는 피폐해지면서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당현종은 황후와 형제에게는 화를 내지 않았지만 아버지로써는 최악의 황제였는데 반란 혐의가 확인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황태자 이영, 광왕 이거, 악왕 이요 등, 자기 아들 셋을 가차없이 죽여버렸고, 아들인 수왕 이모의 왕비이자 며느리인 양옥환을 빼앗아 자신의 첩인 귀비로 삼는 등, 중국 역사에서 [[후조]]의 황제인 [[석호]]와 더불어 최악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는다. 심지어 후임 황제인 당숙종이 피폐해진 이유 역시 선제 현종에 의해 형제들이 학살당하는 꼴을 보거나 피폐해진 삶을 봐서 그렇다는 반응이 많다. 그러나 문제는 숙종 역시 아버지처럼 후처와 측근의 참소만 믿고 그에게 효성을 다한 차남 이단을 죽여버린 막장부모였다는 것이다. 종합하면 현종은 좋은 남편, 좋은 형, 좋은 동생이었지만 아들들에겐 나쁜 아버지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