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현상윤 (문단 편집) === [[중앙고등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장 시절 === 출옥 후 [[중앙고등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이 되었다. 그러나 옥고를 치르는 과정에서 얻은 폐결핵으로 오래 고생했다. 1922년 월남 [[이상재]]의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집행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23년, 조선물산장려회 창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30대 중반에 폐병이 심해져서 5년간 생사를 오가며 투병하였다. 1931년, 소설 '홍경래전'을 동아일보에 24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1932년, 일본에 정변이 일어나자 그 이면에 있는 군부 파시즘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곧 동양에 전운이 휘몰아칠 것을 예지하는 글을 동광 제35호에 게재하였다. 1934년에는 조선후기 실학을 연구하여 유성원, [[이익(실학자)|이익]], [[정약용]]에게 경제사상이 있음을 소개하였다. 특히 정약용을 [[아담 스미스]]에 비견할 학자로 높이 평가하였다. 1940년에는 [[중앙고등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이면서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경에게 수모를 당하였다. 당시 중앙고보가 [[일본어]] 교재를 사용하지 않은 것도 이때에 지적되었다. 1941년에는 일제가 금서로 지정한 책을 몰래 읽으면서 토론하는 '5인 독서회'가 중앙고보에서 발각되면서 [[일본제국 경찰]]에 체포, 구금되었다. 일제가 5인 전원의 퇴학을 강압하였으나, 자청하는 학생 1인만 유기정학 처분하였고, '5인 독서회'의 지도교사인 [[최복현]]은 다른 곳에 직장을 알선하였다. 1944년, [[중앙고등학교|중앙고보]] 배석장교 사이또가 일본군에 자원입대를 권하는 연설을 장황하게 하였는데, 중앙고보 학생 가운데 1명도 자원입대에 응하지 않았다. 사이또가 욕설을 하고 물러가자, 교단에 올라가 입대에 불응한 학생들 모두를 칭찬하였다. 1945년 4월, 중앙고보 2층 강당에서 일본 배석장교가 학생들에게 소년항공학교 지원을 강권하는 연설을 했는데, 이에 몇 명의 학생이 지원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 학생들의 부모에게 급히 전보를 띄우고 학부모들을 불러 "자식을 어떻게 가르쳐서 [[일본군]]에 자원입대하게 만드느냐"고 엄히 힐책하였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 동년 9월에 미군정에 의해 [[경성제국대학]]의 예과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면서 [[중앙고등학교|중앙고보]] 교장을 사임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