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현대자동차 (문단 편집) === 현대자동차 초기 === 현대자동차의 공식적인 역사는 1967년 자동차 제조업에 뛰어들면서부터 시작한다. 1967년 12월 정주영의 동생 [[정세영]]이 정식으로 회사를 설립하여 당시 자동차 최강국인 [[미국]]의 [[포드 모터 컴퍼니]]와 기술제휴를 체결했으나 포드와 소형차에 대한 협력에 문제가 생겨서 독자 모델 개발을 추진했지만 마땅한 기술제휴 회사를 구하지 못했다.[* 1973년 결별][[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0/0001990861|#]] 1970년대 중후반에는 [[메르세데스-벤츠]]와도 기술제휴를 맺었다.[* 1980년대 중반 결별.] 마지막으로 찾아간 [[미쓰비시 자동차]]에서 소형차 개발을 도와주겠다고 1973년 기술제휴를 체결하며 차체와 엔진 변속기에 대한 생산기술을 얻었고, 1976년 1월 포니를 판매하게 되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0/0001990861|#]] 1974년 현대자동차써비스를 세워 자동차 수리사업에도 진출했다. 이후 독자적인 모델의 생산을 위하여 자체개발을 시작했으며, [[영국]] 최대 자동차 회사 [[브리티시 레일랜드]] 부사장이었던 [[조지 턴불]]을 영입하고[[https://www.youtube.com/watch?v=cz3zJORvntE|#]][* 조지 턴불이 현대자동차에 부임한 후 [[영국방송공사|BBC]]에서 촬영한 영상이다. [[조지 턴불]]은 1977년까지 현대자동차 부사장으로 일하다가 귀국하여 영국 자동차공업협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영국 근대 산업화의 공로를 인정 받아 1990년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 1992년 사망.] 1974년 7월부터 1억 달러의 공사비를 들여 연산 56,000대 규모의 종합 자동차 공장 건설에 들어갔다. 같은 해엔 한국증권거래소에 주식상장했다. 1975년 울산공장 준공 후 [[1976년]] 1월 [[대한민국]] 자동차공업의 자립화를 선언한 고유 모델인 [[현대 포니|포니]]를 시작으로 독자모델 생산을 시작하여[* 엔진과 트랜스미션은 [[미쓰비시 자동차]]와 기술계약을 통해 제작했고 디자인은 이탈리아의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디자인하였다.] [[현대 쏘나타|쏘나타]]를 기점으로 [[대한민국]] 최대 자동차 기업으로 떠올랐고, [[아시아]]에서 2번째로, 독자 자동차 모델 생산국이 되었다. 1977년 당시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 [[미국]] 대사는 정주영 회장을 만나 현대가 자동차 독자 개발을 포기하면 [[포드 모터 컴퍼니|포드]]든 [[제너럴 모터스]]든 원하는 조건으로 조립생산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다해 현대를 지원하겠다. 중동 건설에서도 현대를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정주영은 "자동차는 달리는 국기나 다름없고, 일생에 번 돈을 다 들여 실패하더라도 후대에 자동차 공업을 성공시킬 디딤돌을 놓는다면 후회는 없다"며 거절했다.[[https://www.hankyung.com/news/article/2015101411321|관련기사]] 아무래도 [[대한민국]]이 언젠가는 [[미국]] 자동차 산업을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주영은 결국 모든 압력을 무시하고 독자개발을 밀어붙였다.[* 저 당시는 [[오일쇼크]]로 연비가 낮던 미국 자동차들이 좋은 연비로 무장한 일본제 자동차들에게 밀려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러 미국 대사의 예측처럼 결국 현대자동차그룹은 미국 자동차 회사를 꺾고 전세계 3위 규모의 자동차 그룹이 되었다.] 다만 독자개발은 현대에게 있어서도 사운을 건 도박과도 같은 일이였는데 동생 [[정인영(기업인)|정인영]]은 [[정주영]]에게 독자 개발하려면 자기자본의 20~30배나 되는 돈이 필요하고 돈을 구한다 해도 타산이 맞으려면 최소 50,000대는 팔아야 한다. 그런데 1973년 대한민국 전체 자동차 판매량이 승용차, 버스, 트럭 다 합쳐봐야 겨우 18,000대를 넘길 정도였고 현대는 그중 겨우 4,000대를 팔았다. 내수 시장에서도 겨우 이정도 밖에 못파는게 현실이라며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포니는 개발후 출시 전 부터 62개국 228곳의 상사에서 수입을 희망했을 정도로 국제적으로 엄청난 대박을 치게되고 정인영의 걱정은 다행스럽게도 기우로 끝나게 된다. [[1976년]]에 [[에콰도르]]에 [[현대 포니|포니]] 6대를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국산차를 해외 시장에 내놓았다. 1983년 캐나다 현지법인을 세워 해외 판매망 구축을 시작했고, 1985년에 자동차 시트 제조업체 효문산업을 합병하고 1986년에 [[현대 엑셀|포니엑셀]]을 북미 지역으로 수출해서 북미 시장에 진출하여 1989년 캐나다 퀘벡 주 브로몽에 현지 공장을 세웠으나 잇따른 부진으로 1993년에 이 공장을 닫았고 1995년에는 전북 전주공장, 1996년에 충남 아산공장을 각각 세웠으며 같은 해에는 인도 현지 법인을 세웠다. 사실 이 기간 동안은 현대자동차의 사활이 걸린 기간이었다. 정주영은 1960년대에 현대자동차 내부에서 자동차 엔진을 자체 개발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대한민국의 엔지니어들의 전문성은 다른 나라에 비해 낮은 편이었고, 정부에서도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중에서 무엇을 택할 것인지 압박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정주영은 여기서 중공업은 나중에 투자하여 키워도 된다고 판단했기에 현대자동차를 택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자체 엔진 개발에 착수하기 위해 해외에서 [[제너럴 모터스|GM]]에 근무중이던 이현순 박사[* 前 현대자동차 부회장, 現 두산 부회장]를 불러 엔진 자체 개발 연구에 참여하도록 설득했다. 이때 정주영은 이현순 박사에게 자체 엔진을 개발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지원을 하겠다면서 설득했고 결국 이 박사가 이 제안을 수락하자 정회장은 연구소를 건설해주기 시작했는데, 이 연구소가 바로 현대자동차 마북리 연구소이다. 물론 성공확률은 낮았고, 주변에서의 실패할 거라는 무시, 그리고 당시 미쓰비시에서 엔진 설계도를 사와서 제조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미쓰비시에서의 압박도 상당했다. 하지만 이현순 박사의 끈기있는 노력 덕분에 현대자동차는 국내 최초로 자체 엔진을 개발해냈다. 프로젝트 내 이 엔진의 이름은 [[현대 알파 엔진|알파엔진]]이다. 이후 [[현대 베타 엔진|베타엔진]], [[현대 감마 엔진|감마엔진]]을 설계, 개발했다. 하지만 감마엔진은 당시 현대자동차의 경영진이 미쓰비시의 시리우스2엔진과 관련하여 계약을 맺는 바람에 설계만 하고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 이후 이현순 박사는 감마엔진에서 성능을 더욱 향상시킨 [[현대 세타 엔진|세타엔진]]을 개발해냈고, 이 세타엔진은 바로 기아 로체와 NF소나타에 장착되게 된다. 이후 2008년까지 [[현대 타우 엔진|타우엔진]]을 개발하게 된다. 현대자동차그룹에서 개발한 자동차 엔진의 자세한 목록은 하단 둘러보기 문단을 참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