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현대자동차 (문단 편집) === 아도써비스~구 현대자동차 === 쌀가게 '경일상회' 주인이던 아산 [[정주영]]이 [[일제강점기]]인 [[1940년]] 3월에 인수하여 [[경기도]] [[경성부]] 아현정(現 [[서울특별시|서울]] [[마포구]] 아현동)에서 운영했던 '''아도써비스'''[* 아도는 영단어 '''아트(Art)'''를 음차한 것이다. 아시아(Asia)를 과거에는 '''아세아(亞細亞)'''로 음차해서 표기했던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라는 [[자동차 정비소]]를 그 근원으로 볼 수 있다.[*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현대자동차의 공식적인 회사연혁에 포함되지 않는다. [[모터트렌드]]지의 정몽구 회장 기사에서 현대자동차의 시작을 [[정주영]] 회장 형제들이 운영하던 정비소라고 서술한 것을 보면 해외에까지 널리 알려진 내용으로 보인다.] 정주영은 빨리, 완벽하게 고치고 수리비는 많이 받는 방침으로 사업 성공의 토대를 닦았다. 1940~1942년 당시 조선에서는 자동차는 극소수의 부유층이나 가지고 탈 수 있는 매우 비싼 사치품이었다. 당시에는 간단한 수리여도 수리일을 늘려서 공임을 더 받거나 일부러 부실한 수리를 해서 당시 정비소에 찾게 하려는 관행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자동차가 고장나면, 차 주인이 발이 묶여 힘들어한다. 그러므로, 빨리 차를 고치는 게 고객을 위한 길이다'라며, 수리일은 아무리 큰 고장이라도 무조건 3일 이내, 다시 고장이 나지 않게 완벽하게 수리한다는 기치를 내걸었다. 대신 수리비용은 다른 공장에 비해 3~5배를 받았다. 그러나 위에 언급했듯 자동차는 당시 부유층이나 소유할 수 있는 사치품이었고, 이들에게는 그저 수리비 돈 몇푼보다 빨리, 정확하게 수리하는게 더 중요했기 때문에 비싼 가격에도 순조롭게 사업을 이어나갔다. 밤 12시까지 작업소에 머물면서 고객들 차를 빨리 빨리 수리했다. 이처럼 "빨리 빨리"와 "빠르고, 정확하고, 납기 준수"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경영은 순조로워 수익을 많이 냈다.[* 이때 고객의 운전수였으며, 자동차 정비에 유능했던 '''김영주'''를 영입하였는데, 정주영 회장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훗날 [[현대그룹]]의 방계인 '''[[한국프랜지]]'''그룹을 분할받아 독립한다.][* [[http://www.reportnet.co.kr/knowledge/pop_preview.html?dn=1136687|관련 링크]]] 그러나 초창기의 공장은 25일만에 불타 없어졌다. 새벽에 밤새도록 일을 하고 난 한 공원이 기름투성이 손을 씻기 위해 시너로 불을 지펴 물을 데우다가 그만 잘못해 불이 나고 말았다. [[https://www.top-rider.com/news/articleView.html?idxno=1451|#]] 그 이후 아도써비스는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의 조그만한 공터에서 다시 공장을 세워 운영했다. 다행히도 그동안의 신뢰가 있었기에 고객들이 다시 찾아와 줬으며 상당히 흥하게 되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전쟁]]까지 일어나자 다시 사업이 어려웠다. 결국 일제는 기업 통제 정책인 '기업정비령'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 종로 5가에 있는 '일진공작회'로 정주영이 소유하던 아도써비스가 강제 흡수·합병되었다. 정주영은 어쩔 수 없이 자동차 수리업을 그만두었다. 이후 아도써비스를 정리한 자금으로 트럭을 구입하여 석탄운반업[* 아도써비스 직원도 징병되는 등 전쟁이 한창인 시절이었는데 정주영은 나이가 많아 징병 대상이 아닌 징용 대상이었으나 석탄 운반업을 하면서 군수산업종사자로 분류되어 징용이 면제되었다고 한다.]을 하였으며, 해방 이후 중구 초동의 적산대지 등을 불하받아 [[1946년]]에 '''현대자동차공업사'''[* '''"현대"'''라는 이름을 이때 처음 쓰게 되었으며 현재의 현대자동차 원효로 사옥 및 서비스센터 공터 등으로 남아있으며 이 자리에 있던던 원효서비스센터는 [[일산서구|일산]] [[킨텍스]] 인근으로 이전해 현재 [[현대 모터스튜디오#현대 모터스튜디오 고양|현대 모터스튜디오 고양]]이다.]를 설립한다. 설립 직후에는 미군 병기창에서 하청을 주로 받았으나 점점 수요가 늘었고, 이 회사를 '''현대토건'''사가 흡수해서 '''[[현대건설]]'''로 변모한다.[* 흡수로 표기하고 있지만 아산 [[정주영]] 회장의 두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이 땅에 태어나서》에서는 "전쟁통에 건설업자들이 미군 자금을 긁어가는 걸 보고 우리 회사 역량으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간판부터 우선 올리고 봤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아마도 서류상으로 법인을 현대토건으로 흡수시켰다는 이야기인 듯하다. 현대건설 공식 홈페이지의 회사연혁에는 1947년 5월 현대토건사 설립, 1950년 1월 현대건설주식회사 설립(현대자동차공업사, 현대토건사 병합)으로 기재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