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헤이룽장성 (문단 편집) == 역사 == 과거 [[부여]], [[실위]], [[숙신]] 등이 발흥한 곳이다. [[부여]], [[고구려]], [[발해]], [[금나라]] 등을 거쳐오다가 [[몽골]]의 침략을 받고 오지로 전락하였다. 그 뒤 [[청나라]]는 [[1644년]] 중원 정복 이후, 중원 지역에 대해서는 '행성제(行省制)'를 적용했지만 만주 지역에 대해서는 장군부(將軍府)를 두어 통치하게 하는 '군부제(軍府制)'를 채택했다. 이에 [[1653년]]([[순치]] 10) 지금의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닝안시(寧安市)에 '영고탑앙방장경(寧古塔昻邦章京)'이라는 벼슬을 두었다가, [[1662년]]([[강희]] 1) 이를 '진수영고탑등처장군(鎭守寧古塔等處將軍, 약칭 영고탑장군)'으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1671년]](강희 10) 흑룡강변에 성을 쌓고 '헤이룽장성(黑龍江城)'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 뒤 이 영고탑장군은 [[1676년]](강희 15) 지금의 지린성 지린시로 주둔지가 옮겨졌고, [[1683년]](강희 22) 지금의 헤이룽장성 [[치치하얼시]]에 흑룡강장군(黑龍江將軍)이 별도로 설치되었다. 이는 현재의 헤이룽장성의 전신이 된다. 한편 [[유럽]]에서 계속 [[시베리아]]로 진출하던 [[러시아]]가 이 부근까지 오게 되자, [[청나라]]는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과 [[캬흐타 조약]]이라는 국경 획정 조약을 맺기도 하였다. 이 조약이 체결된 후 정해진 헤이룽장성의 강역은 현재와 좀 다른데, 현재 헤이룽장의 남부가 [[지린성]] 소속이었으며 이때의 헤이룽장은 현재 헤이룽장의 북부와 러시아의 [[아무르 주]] 대부분이 속해있던 곳이었다. 현재 헤이룽장의 북부 지역이 당시 헤이룽장성의 중앙부였던 셈이다. [[제정 러시아]]가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으로 [[프리모르스키 크라이|연해주]] 및 [[만주|외만주]]를 빼앗고 [[의화단 운동]]에서는 20만 명의 대군을 진주시켜 만주 전체를 점령하여 극동총독부를 설치하였으며 더 나아가 동만철도가 있는 '''북만주와 [[하얼빈]]을 차지하고 [[송화강]]과 [[고비 사막]]을 [[러시아]] - [[청나라|청]]의 경계로 삼으려 하였다.''' [[제정 러시아]]가 실제로 북만주를 빼앗았다면 [[중국]]의 만주 국경은 [[명나라]] 초기 때로 축소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하여 실현되지는 않았다. [[1909년]] [[10월 26일]]에는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저격했다.]] [[신해혁명]] 이후에는 혁명당 출신의 주칭란이 지배했으나 곧 [[장쭤린]]의 부하 손열신이 장악했으며 이어 [[우쥔성]]이 흑룡강성 독군에 임명되어 [[1928년]]까지 지배했다. 허나 [[1931년]] 9·18 [[만주사변]] 이후 [[관동군]]에게 점령당했으며 [[1932년]] [[만주국]] 수립 이후 만주국의 영토가 되었다. 일본 치하동안 하얼빈 근교에 그 악독한 [[731 부대]]의 수용소와 실험실이 다수 설치되기도 했다. 현재는 중국 정부가 기를 쓰고 발굴하려고 하는 듯하다. 일본 패망 이후에는 소련군 통치 아래 들어갔다가 얼마 안 가 [[국공내전]]을 마친 [[중국]] 산하의 성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