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헌종(조선) (문단 편집) == 여담 == * [[야사(역사)|야사]]에 따르면 헌종은 [[조선/역대 왕비|계비]] [[간택|삼간택]] 때 김재청의 딸인 [[경빈 김씨]]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하지만 자신의 의사와 달리 할머니 [[순원왕후]]와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신정왕후]]가 홍재룡의 딸인 [[효정왕후|효정왕후 홍씨]]를 [[조선/역대 왕비|계비]]로 간택하자 3년 뒤에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간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빈 김씨]]는 [[조선/역대 왕비|계비]] [[간택|삼간택]]에 참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야사(역사)|야사]]라고 한다. 헌종은 [[경빈 김씨]]를 위해 친히 [[창덕궁 낙선재|낙선재]]를 지었을 정도라고 한다. * 17세에 천연두를 앓은 기록이 전해진다. * 《[[헌종실록]]》 1권에서 '[[외모]]가 준수하고 명랑하며 큰 [[목소리]]가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헌종 대왕 행장(行狀) >---- >왕은 용청(龍睛)에 서각(犀角)이고 __외모가 준수하고 명랑하며__, >__큰 목소리가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으며__ 백일이 되기 전에 능히 일어서셨다. >---- >- '''《[[헌종실록]]》 1권, 헌종대왕 행장 中'''[* [[https://sillok.history.go.kr/id/kxa_200007|#]].] * 4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여의고 항상 효명세자를 그리워하였다. 효명세자의 외모를 기억하지 못하는 걸 안타깝게 여겨서 신하들에게 효명세자의 외모에 대해서 질문하니 "진전에 모신 수용이 오히려 매우 닮으신 전하의 용안에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자신의 외모가 효명세자와 비슷하다는 대답을 들은 헌종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하염없이 슬퍼하였다. * 또한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태어날 때 [[정조(조선)|정조]] 외모와 판박이었다고 전해지므로 헌종이 아버지인 효명세자 외모를 닮은 것을 보면 [[정조(조선)|정조]]와도 비슷한 용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조선왕조실록에 헌종이 즉위할 때 신하들이 절실하고 시급한 여섯 가지 일들을 아뢰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중 궁위를 엄하게 하라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더욱이 어리신 나이라 보통 한가로이 계실 때쯤 무리들과 쉽게 친숙해지고 자질구레한 장난감으로 이러한 무리들은 쉽게 유혹하니 심지를 고혹시켜 성공에 누를 끼침은 모두 이에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순조|선묘]](先廟, [[순조]])께서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셨으나 환시를 거느리심이 매우 엄해 항상 말을 붙이지 아니하시어 전하께서는 힘쓰소서.'라면서 언급된다.[* '''《[[헌종실록]]》 1권, 헌종 즉위년([[1834년]], 청 도광(道光) 14년) 12월 16일 (병오)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xa_10012016_001|#]].] 헌종이 [[미남]]이라 젊은 궁녀들이 승은을 입기 위해 유혹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아마 앞서 말한 《[[헌종실록|실록]]》에 언급된 내용을 '미남이라 궁인들이 유혹하기에 안달났다' 이런 [[뉘앙스]]로 호사가들에 의해 널리 왜곡되어 알려진 것 같다. 헌종실록을 보면 알다시피 '헌종이 [[미남]]이라 [[궁녀|궁인]]들이 유혹했다'보다는 '젊은 나이에 즉위해 궁녀 환관 등 이들이 쉽게 유혹을 해서 누를 끼친다' 이런 식으로 실제로 얘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 왕은 외모와 무관하게 궁녀들의 관심사인데 승은을 입기가 수월한 이유가 크기 때문이다. 궁녀들과 지나치게 성관계를 가졌다는 설화가 있는데 헌종이 궁녀들을 가까이 한 건 안동 김씨의 후손을 낳지 않고 후궁으로 대를 잇겠다는 의지라고 보는 해석도 존재한다. * 좋은 외모에 영민한 편이었지만, 제대로 된 노력을 해보기도 전에 20대 초반에 [[요절]]하는 등 여러모로 아버지 [[효명세자]]를 닮은 [[조선/왕사|왕]]이다. 실제로 [[효명세자]]와 헌종 부자는 외모가 판박이였다고 하며 [[죽음|승하]] 당시 나이도 [[효명세자]]보다 불과 1살밖에 많지 않았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죽음|승하]] 당시 장소는 신분과 정반대인데, [[효명세자]]는 [[조선/역대 왕세자|세자]] 신분에 편전인 [[창덕궁 희정당|희정당]]에서 훙서하였고, 헌종은 [[조선/왕사|국왕]] 신분에 [[동궁]]인 [[창덕궁 중희당|중희당]]에서 승하하였다. * [[서예]]에 능했으며 특히 [[예서]]에 능했다고 한다. * 세간의 평가와 달리 [[왕권]] 강화를 위해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세도 정치|세도]] [[가문]]을 견제해 이들을 제어하는 노력을 하였고 각종 서책 간행을 하였다. 동시에 [[수령]]의 [[뇌물]] 문제를 건드려 민생을 바로 잡으려 하였다. 하지만 너무 이른 나이에 [[사망]]하여 제대로 된 시도조차 하지 못하였으며, 그 결과 기울어가는 [[조선]]을 끝내 바로잡을 수 없었다. * 실제로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에서 헌종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증거는 많은데, 할머니 [[순원왕후]]는 헌종을 "남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지 않고 의심이 많으며 시기심이 강하다"라는 평을 내렸다. 특히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출신의 [[조선/역대 왕비|왕비]]이자 헌종의 친할머니였던 [[순원왕후]]의 어필 봉서[* (헌종이 죽기 며칠 전) '왕을 몰아내지 않으려고', '내 집의 패악한 자식', (헌종 사후) '나도 거리길 거시 업서 싀훤해' 등]을 보면 헌종과 김씨였던 [[순원왕후]]가 의외로 상당한 갈등을 벌였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변원림의 해석(<순원왕후 독재와 19세기 한국 사회의 동요>, 2012년) 참조. 다만, <순원왕후의 [[한글]] 편지>를 편집한 [[이승희]] 교수는 이를 '안동 김씨 일가의 패악한 이'로 해석한다. 《대비, 왕 위의 여자》의 [[김수지]]의 종합에 따르면 [[순원왕후]]는 대체로 [[신 안동 김씨|친정 김씨]] 가문을 '우리 집'이라고 하고 [[조선/왕실|왕가]]를 '내 집'이라고 했는데, [[순원왕후]]는 '내 집'을 거론했으므로 '내 집의 [[패륜아|패악한 자식]]'이라고 언급할 만큼 손자 헌종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본다.][* [[신 안동 김씨|김씨 문중]]의 [[김흥근]]이 [[유배]]를 가게 되었을 때 그것을 막지 않은 [[순원왕후]]에게 질타가 쏟아지자 같은 [[편지]]에서 "[[김흥근]]이 떳떳하다면 (유배는) 금방 지나갈 액운이며, [[신 안동 김씨|우리 가문]]이 흥하는 것은 오히려 [[하늘]]의 경계이니라.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또한, [[철종(조선)|철종]]의 [[조선/역대 왕비|왕비]]를 [[간택]]할 때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문중]]을 배제하도록 조언하거나 [[김흥근]]의 아들이 요직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등 [[신 안동 김씨|가문]]과 일정거리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 [[박시백]] 역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자신의 만화]]에서 헌종의 [[사망|훙]](薨)에 대해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 일문에게 헌종의 때이른 [[죽음]]과 [[순원왕후]]의 2차 [[수렴청정]]은 행복한 사태 반전이었다."라고 언급했다. * 앞서 소개되었듯이 헌종은 [[조선/왕사|후사]]가 없어 [[정조(조선)|정조]]의 '''생물학적''' [[직계]] [[혈통]]은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다. 헌종이 [[사망|승하]]한 이후 [[조선]]의 [[조선/왕사|왕위 계승권]]은 정말 복잡해졌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정조(조선)|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임오화변]]으로 [[폐서인]]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사도세자]]의 유일한 생물학적 [[적자]]인 [[정조(조선)|정조]]는 [[폐서인]]이 된 아버지 [[사도세자]]의 [[아들]] 자격으로는 [[왕세손|세손]]의 신분을 유지할 수 없었다.[* '逆敵之子 不爲君王(역적지자 불위군왕). 역적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는 기지로 [[정조(조선)|정조]]에게는 끊임없이 불안정한 [[조선/왕사|왕위 계승]]에 대한 의심과 눈초리로 내내 꼬리표를 달았고, 이 때문에 [[암살]] 위협도 수차례 받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조]]는 [[정조(조선)|손자]]를 오래전에 조졸한 자신의 [[효장세자|큰아들]]의 [[양자(가족)|양자]]로 보내 [[왕세손|세손]]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물론 [[조선/왕사|왕위 계승]]과 전혀 관계 없는 [[사도세자]]의 서자인 [[정조(조선)|정조]]의 이복동생들([[은언군]]·[[은신군]]·[[은전군]])은 그대로 [[사도세자]]의 가계에 남겼다. [[정조(조선)|정조]]의 바로 아래동생인 [[은언군]]은 자신의 아들인 [[상계군]]이 [[역적]]으로 몰리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 나버렸으며, 엎친데 덮친 격으로 막내아들인 [[전계대원군|전계군]]의 큰아들인 [[회평군]]마저도 [[역모]]에 휘말려 죽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전계대원군|전계군]]의 남은 자식인 [[영평군(1828)|이경응]]과 [[철종(조선)|이원범]]은 [[강화도]]에서 [[평민]]으로 살고 있었다. 헌종의 할머니로서 당시 [[조선/왕실|왕실]]의 제일 큰 어른이었던 [[순원왕후]]는 이원범을 [[양자(가족)|양자]]로 들여 [[조선/왕사|차기 국왕]]으로 공식 지명하였으며, 이원범이 바로 [[조선]]의 제25대 임금 [[철종(조선)|철종]]이다. [[철종(조선)|철종]]은 생물학적으론[* [[정조(조선)|정조]]를 [[사도세자]](장조)의 아들로 볼 경우.] 제24대 임금인 헌종과 7촌(재종숙) 관계이고, 족보상으론[* [[정조(조선)|정조]]를 [[효장세자]](진종)의 [[양자(가족)|양자]]로 볼 경우.] 9촌 관계로 먼 친척이었다. [[철종(조선)|철종]] 사후 [[조선/왕사|왕위 계승]]은 이보다 더 복잡하다. [[철종(조선)|철종]] 또한 후사가 없이 오랜 병으로 30대 초반에 [[사망]]했다. 당시 [[조선/왕실|왕실]]의 제일 큰 어른은 [[순원왕후]]의 [[며느리]]이며, [[효명세자]]의 [[아내]]이자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 조씨|신정왕후]]였고, 신정왕후는 [[흥선대원군|흥선군]]의 차남 이명복을 [[양자(가족)|양자]]로 들여 [[조선/왕사|차기 국왕]]으로 지명하게 된다. 그가 바로 [[조선]] 제26대 [[조선/왕사|임금]]이자, [[대한제국]]의 [[대한제국/황사|초대 황제]]인 [[고종(대한제국)|고종]]이었으며,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전임자인 [[철종(조선)|철종]]과 족보상으로[* [[철종(조선)|철종]]과 [[흥선대원군]]은 촌수는 멀지만 어쨋든 같은 항렬이며, [[철종(조선)|철종]]의 고조부(4대조)는 [[영조]]이고 [[흥선대원군]]의 고조부는 양자 제도를 여러 거쳐 [[연령군]]이다. 즉, 고조부끼리 형제이다.] 11촌 관계였다. 물론 족보상으로 볼 땐 먼 친척이지만, [[양자(가족)|양자]] 관계를 통해 비교적 가까운 친척으로 볼 수 있는데 [[흥선대원군|흥선군]]의 아버지 [[남연군]]은 [[은신군]]의 [[양자(가족)|양자]]이고, [[사도세자]]의 [[서자]]였던 [[은신군]]은 작은 할아버지 [[연령군]]의 봉사손이 되어 출계했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조선/왕실|왕실]]의 손이 귀해졌다는 것을 방증하는 사례'''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