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헌종(당) (문단 편집) ===== 제3차 번진 제압전 - 회서, 성덕 번진 토벌(814~817) ===== 제3차 [[번진]] 토벌은 번진 제압을 위한 [[전쟁]] 중 '''가장 기나긴 토벌 작전이었으며, 사실상 번진 제압의 분수령이 된 전쟁이었다'''. 제3차 번진 토벌 작전은 814년 윤 8월, 회서[[절도사]] 오소양이 사망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오소양은 제2차 번진 토벌 직전 사망한 오소성의 아들이었으며, 그가 지배하는 회서 번진은 비록 3개 [[주(행정구역)|주]]만을 보유한 작은 번진이었으나 최대의 번진 세력인 평로치청 번진과 긴밀한 동맹을 맺고 순치 관계에 있었다. 때문에 제2차 토벌전 때도 회서 번진을 치는 것이 낫다는 조언을 하는 대신들이 많았다. 오소양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아들인 '''오원제'''였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숨기고 단지 병이 들었다고만 보고하며 스스로 군권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소양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조정에 들어가 조현하라는 주변의 충고를 모두 무시하며, 충고한 사람을 잡아 죽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헌종은 오원제 토벌 준비에 들어갔다. 9월, 헌종이 마지막으로 오원제를 떠보기 위해 보낸 칙사를 거부한 오원제는 먼저 선공을 걸었다. 그는 무양([[하남성]] 무양현), 섭([[하남성]] 섭현), 노산([[하남성]] 노산현), 양성([[하남성]] 양성현)을 공격했고, 심지어 동도 '''[[낙양]]까지 공격'''했다. 먼저 한방 맞은 헌종은 오원제의 관직과 작위를 삭탈하고 엄무를 신·광·채주초무사에 임명, 총사령관으로 삼고, 이를 감독할 인물로 내상시지성사 최담준(환관)을 임명해 토벌령을 내렸다. 또한 신책군과 더불어 충무절도사 이광안, 하양절도사 오중윤, 선무절도사 한공무, 수주[[자사]] 이문통에게 엄수를 따라 회서 번진을 토벌하라고 명령했으며, 상서좌승 여원응을 동도(낙양)유수로 임명했다. 또한 이후에도 근처의 [[관찰사]], 병마사, 절도사들에게 오원제 토벌에 동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나의 작은 번진이자 관외군이 채 2 ~ 30,000명 정도에 불과했던 회서 번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진들의 공격을 상당히 잘 버텼다. 이는 역시나 '''절도사, 병마사, 관찰사들이 휘하의 병사들을 아끼느라 몸을 사렸기 때문'''으로, 기껏 이겨 놓고도 방심하다가 야습을 받는다든가, 협조가 잘 되지 않았거나 하는 모습이 많았다. 그나마 충무절도사 이광안과 신책군을 지휘한 유공작 정도가 적극적인 토벌전을 벌여 성과가 있었다. 그래도 워낙에 군사력 차이가 많이 났기에 회서 번진은 차츰 주요 거점을 잃어가면서 몰리게 되었고, 오원제는 필사적으로 성덕 번진과 평로치청 번진에 구원을 요청했다. 815년, 당시의 평로치청 번진의 절도사였던 [[이사도]]([[이정기]]의 손자)는 오원제를 돕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이 토벌전은 '''회서, 성덕, 평로의 세 번진 연합과 [[당나라|당]] 조정 사이의 정면 대결'''의 양상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이는 4진의 난 이래 거진 40년 만의 일이었다. 이사도는 오원제와 함께 싸우기로 결심했지만, 처음에는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성덕 번진의 수장인 왕승종과 함께 표문을 올려 오원제를 옹호하면서 자신이 육성한 [[자객]] 및 [[도적]]들을 동원해 하음원에 쌓여 있었던 [[군량미]] 30,000여 곡을 태우고 화폐 30여만 민을 약탈했다. 또한 [[장안]]까지 자객을 파견하여, 헌종을 군사적인 면에서 보좌하던 [[재상]] 무원형,[* 이길보가 814년에 사망한 이후 헌종을 군사적인 부분에서 보좌한 인물이었다.] 재정적인 측면에서 보좌하던 재상 배도를 대상으로 [[암살]]을 시도해 무원형을 살해하고 배도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당시에는 성덕 번진의 왕승종이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지만 후에 이사도가 저지른 일임이 확인되었다.] 여기에 더해 이사도 자신이 운영하던 낙양의 유후원에 병사들을 몰래 숨겨두었다가 낙양을 습격하여, [[궁궐]]에 불을 지르고 약탈할 계획까지 짰지만 밀고자가 나오면서 실패했고, 이사도가 오원제와 손을 잡고 반기를 들었음이 밝혀졌다. 성덕 번진, 평로치청 번진이 회서 번진에 합류하면서 자연스럽게 토벌군도 나누어질 수밖엔 없었다. 때마침 귀순한 위박 번진, 그리고 성덕 번진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노룡 번진, 황해 번진, 의무 번진이 성덕 번진 토벌에 동참하겠다고 나섰고, 이쪽으로 파견된 신책군과 함께 성덕 번진 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최대, 최강의 번진 세력이었던 평로치청 번진을 상대로는 견제성 병력 약간만을 배분할 수밖에 없었다. 제3차 번진 토벌은 816년을 거처 817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때 회서 번진을 공격하던 토벌군은 90,000명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절도사들이 자기 병력을 아끼느라 오히려 병력 부족에 시달렸다. 이 과정에서 엄무가 고하우로, 고하우가 다시 원자로 교체되었지만 누구 하나 제대로 이기지 못했고, 결국 [[당나라|당]] 조정 측은 성덕 번진과 회서 번진을 동시 공략하려던 기존의 계획을 버리고 회서 번진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태자첨사였던 '''이소'''[* [[이성#s-5|이성]]의 아들이다.]로 하여금 원자를 대신하게 했다. 전면에 나선 이소는 지지부진한 전황을 한번에 끝낼 기습을 생각했다. 그것은 회서 번진의 처소가 위치한 채주를 기습해 오원제를 포로로 잡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이소는 우선 직속 부대를 적극적으로 운용하여 회서 번진을 압박했고, 오수림과 동창령 등 회서 번진의 여러 장수들의 항복을 받아내는 성과를 냈다. 이때문에 오원제는 채주를 지키던 병력까지 전면에 배치했다. 이소의 채주 기습 공격의 준비는 수개월을 끌었다. 포로로 잡힌 장수 중 한 명인 이우를 회유해 자신의 심복으로 삼고 산남동도 번진의 정예 병력 3,000여 명을 그의 휘하에 배속시켰으며, 결사대 3,000여 명을 모집해 '돌장' 이라는 특수부대를 편성하고 준비시키는 등 철저하게 기습군을 준비했으며, 준비가 끝났다고 판단하자 이소는 낭산을 공격해 회서 번진 병력들을 모두 낭산으로 끌어내고는 때마침 채주 근방을 휩쓸던 홍수가 멈추기를 기다렸다. 이사도에게 암살될 뻔 했던 배도가 문하시랑·동평장사·겸창의절도사·회서선위초토처치사로 임명되어 [[전선]]을 총지휘하는 [[원수]]가 되어 토벌군 지휘를 일원화했고, 9월이 되자 홍수도 그쳤다. 817년 10월 15일, 이소는 9,000여 명의 병력을 편성하여, 채주를 급습했다. 때가 겨울이었기에 폭풍과 눈이 흩날리는 혹독한 기후였지만 오히려 이것이 채주로 향하는 당군을 가려주었기에 '''하루 만에 150리 이상을 돌파하는 동안 회서 번진군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10월 16일 4고(새벽 3시) 즈음에 성에 도착한 당군은 순식간에 채주성을 장악했고, 오원제를 포로로 잡았으며, 이 소식을 들은 다른 군대들도 모두 항복했다. 거진 3년 이상을 끈 회서 번진의 반란은 이것으로 평정되었고, 성덕 번진과 평로치청 번진 간의 연결고리가 끊어져 두 번진은 고립되었으며, 회서 번진과 행동을 같이하던 성덕 번진은 움직임이 완전히 봉쇄되었다. 이후 이 공으로 이소는 양국공에 산남동도[[절도사]]직을 꿰찼고, 배도는 청의절도사로서 채주 지역을 안정화시켰으며 오원제는 처형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성덕 번진의 왕승종은 두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덕주와 체주를 헌납하면서 조정에 항복했다. 이 토벌전에 동원된 군대는 총 17~18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