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헌종(당) (문단 편집) ===== 제2차 번진 제압전 - 성덕 번진 토벌(809~810) ===== 809년(원화 4년) 3월, 하북 3진 중 하나인 성덕 [[번진]]의 [[절도사]]였던 왕사진이 죽고, 부대사였던 '''왕승종'''이 그 뒤를 이어 유후직에 올라 절도사 업무를 대행하면서 절도사 승계를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다. 여기에 같은 해 7월, 노룡절도사 유제와 위박절도사 전계안, 회서절도사 오소성이 모두 병이 들어 절도사직의 부자 승계를 요구했다. 과거 [[덕종(당)|덕종]]은 4진의 난과 주차-이회광의 난 이후 이러한 요구를 모두 승낙하면서 현상 유지에만 급급했었기에 이들로써는 자연스러운 요구였다. 그러나 헌종은 조부인 덕종과는 달랐다. 제1차 번진 토벌의 성공과 튀르크계 [[사타족]]의 귀부(808년), [[금군]]의 증강으로 자신감을 얻은 헌종은 하북 3진(성덕, 노룡, 위박) 및 회서 번진의 절도사들이 중병이 들었다는 것을 기회로 여기고 토벌할 의도를 내비쳤다. 여러 학사들은 이에 반대했고, 꼭 토벌해야 한다면 하북 3진보다는 그 세가 약한 회서 번진을 제압해야 한다고 조언했으나 헌종은 성덕 번진을 목표로 삼았으며, 왕승종이 두 개 [[주(행정구역)|주]]를 바칠 테니 용납해 달라고까지 청원했으나 헌종은 이를 듣지 않았다. 9월 7일, 헌종은 왕승종을 성덕절도사·항주·기주·심주·조주[[관찰사]]로 삼고, 왕승종이 넘기겠다고 한 2개 주를 관할하는 보신군 번진을 새로이 창설해 왕승종의 사위였던 설창조로 하여금 보신군절도사·덕주·체주관찰사로 삼았다. 이는 성덕 번진의 영역(6개 주)을 쪼개 새로운 번진을 창설하여, 성덕 번진을 견제하고 그 세력을 약하게 만들고자 함이었다. 이에 왕승종이 사위인 설창조를 억류하자 헌종은 설창조를 풀어주라고 압박했으며, 이에 따르지 않자 왕승종 토벌을 결심하고 [[환관]] 토돌승최를 좌·우신책·하중·하양·절서·선흡등도행영병마사·초토처치사로 임명했다. 이는 환관이 최초로 행영병마사 겸 초토처치사에 임명된 것이었으며, 행영절도사가 없었기 때문에 이 말은 곧 '''환관이 여러 번진군을 아우르는 토벌군의 총사령관이 된 것'''이었다. 이에 여러 학사들은 >'''환관이 군을 감시하는 감군이 된 적은 있어도 총사령관이 된 적은 없다.''' 며 강하게 반발했고, 간관과 어사들 또한 토돌승최에게 지나치게 큰 관직을 내린다며 반발했지만, 헌종은 토돌승최의 병마사 작위를 선위사로 내리는 선에서 무마하려 했고, 실질적으로는 끝까지 총사령관 직위를 맡겼다. 모인 병력은 《자치통감》에 따르면 최대 200,000명에 가까운 대병력이었고, 들어간 비용은 700만여 민(통화의 단위)에 달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실패했다.''' 가장 큰 이유는 이 토벌군이 여러 번진들의 연합군이었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으로, 소의절도사 노종사는 조정에 가장 먼저 성덕 번진을 토벌하자고 주청하여 이 토벌군 결성에 크게 기여해 놓고는 막상 토벌에 들어가자 성덕 번진과 은밀히 손을 잡고 식량 보급을 훼방놓으면서 이득을 챙기려 했으며, 4진의 난 과정에서의 반목으로 인해 토벌군에 참여한 노룡 번진[* 엄연히 하북 3진 중 하나이며, 위박 번진, 회서 번진, 평로치청 번진과는 매우 밀접한 관계였으니 이는 꽤 뜻 밖의 일이라 하겠다.]도 몇개 성만을 빼앗고는 주저앉았다. 토벌에 동참하라는 명령을 받은 위박 번진도 형식상 1개 주를 점령한 상태로 멈추어 섰다. 거기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환관인 토돌승최가 직접 지휘하는 신책군 및 하동·하중·진무·의무 4개 번진 연합군은 성덕 번진 군대를 정면으로 공격했다가 자기 군대만을 아끼려 한 절도사들의 비협조로 인해 연전연패했고, 제1차 토벌전 당시 유벽을 사로잡았던 공적이 있는 좌신책대장군 여정진까지 전사해 버렸다. 비록 소의절도사 노종사가 뒤로 손을 잡은 것을 눈치채고 체포하는 데 성공했지만 [[당나라]]로써는 별로 얻은 것이 없었다. 결국 원화 5년(810년) 7월, 1년에 걸친 토벌전은 별 소득도 없이 실패로 끝났다. 왕승종은 형식상 사죄하고 공물과 부세를 바치겠다며 용서를 빌었고, 이사도 등의 번진 세력들이 왕승종을 용서해 달라고 요청하자 이에 헌종은 별수 없이 용서한다는 형식을 취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봤을 때, '''헌종의 제2차 번진 제압전은 최초의 패배였다.''' 이에 토돌승최는 책임을 지고 좌천당했다. 그러나 헌종은 계속 토돌승최를 신뢰했기에 얼마 안가 복직시켜줬고, 환관들의 힘은 더욱 강성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