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허화평 (문단 편집) == 생애 == 1937년 10월 15일 [[경상북도]] [[포항시|영일군]] 장기면 계원리(現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포항)|남구]] 장기면 계원리)에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42500209110001&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3-04-25&officeId=00020&pageNo=10&printNo=22152&publishType=00010|태어났다]]. 포항초등학교, 포항중학교, [[포항고등학교]], [[육군사관학교]] 17기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 동기 [[김진영(군인)|김진영]], [[허삼수]] 등과 [[하나회]]에 가입하였으며 허삼수와는 단짝이었다. 1979년 [[10.26 사태]]와 [[12.12 군사반란]] 당시 전두환 [[국군기무사령부|국군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대령]])이었다. 말하자면 [[독재]] 정권의 개국공신인 셈으로 1980년 9월 [[준장]] 진급 및 동시 예편하였다. || [[파일:external/blog.joins.com/%ED%97%88%ED%99%94%ED%8F%892(1).jpg|width=100%]] || 1980년 9월,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대통령비서실]]의 '비서실 보좌관'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대통령비서실 직제에 비서실 보좌관이라는 직책은 없었다. 말하자면 전두환이 자기 사람을 심기 위해 비서실 보좌관이라는 없던 직제를 일부러 만들어 허화평을 임명한 것이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초기 허화평의 위상과 [[권력]]이 얼마큼 컸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일례로 [[청와대]]의 다른 보좌진들은 별도의 [[건물]]에서 지내는데, 허화평은 청와대 본관에서 전두환과 함께 근무했다. 한 마디로 혼자서 실질적인 청와대 핵심 기획자 역할을 했던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직급만 차관급이었지, 실질적으로는 [[대통령비서실장]], [[국무총리]] 급의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이 시기의 허화평은 사실상 전두환 정권의 [[2인자]]나 다름없었으며, 정변의 실무자로서 박정희를 보좌하여 2인자가 된 [[김종필]]과 비슷하다. 허삼수, 허문도 등과 '쓰리 허'로 불리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허화평의 권력이 너무 강하다는 지적이 대두되자 1981년 12월 대통령비서실 산하 [[정무수석비서관|정무제1수석비서관]]으로 좌천되었다.[* 이후로 대통령비서실장은 1982년 1월부터 [[이범석(1925)|이범석]]이 새로 도맡기도 하였다.] || [[파일:PG-총리+일반%2FPG-1982%2F칼라%2FPG-1982-0139%2F2400dpi%2FPG-1982-0139-021.jpg|width=100%]] || || [[파일:PG-총리+일반%2FPG-1982%2F칼라%2FPG-1982-0139%2F2400dpi%2FPG-1982-0139-034.jpg|width=100%]] || 수석비서관 시절 간담회에서의 모습.[* 첫번째 사진 허화평 오른쪽에 위치한 인물이 [[박철언]]인데 청와대 비서관으로 재직했다.] 1982년 5월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전두환 대통령의 친인척에 대한 견제 기회로 인식하고 친인척의 공직 사퇴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쓰리 허가 너무 큰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생각하던 전두환의 눈 밖으로 완전히 나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1982년 5월 [[대구광역시장|대구직할시장]]으로 가있으라는 사실상의 좌천성 인사를 받게 되지만, 이를 아예 무시하며, 전두환이 그럼 [[국세청장]]을 맡으라고 하지만, 이 역시 거부하고 1982년 12월 정무제1수석비서관에서 사임하게 된다. 이 때 공백이 된[* 미리 초대 대구직할시장인 [[정채진]]을 [[경상북도지사]]로 발령낸 뒤였다.] 대구직할시장 자리에는 [[이상희(1932)|이상희]][* 이상희가 [[신천대로(대구)|신천대로]] 건설, [[두류공원]] 정비 등 대구의 도시 인프라 확충에 꽤 기여한 것을 고려하면 대구 입장에서는 결과론적으로 다행이라고 볼 수 있다.], 국세청장 자리에는 하나회 출신 [[안무혁]]이 앉게 된다. 대구시장은 지자체장이라 한 시의 최고 책임자고[* 지자체장은 성공적으로 능력을 입증한다면 대통령 선거도 도전하는 게 가능하다. 특히나 관선제 시절에는 대구직할시장을 거쳐 내무부 장관으로 간 3명일 정도로 지금보다 위상이 훨씬 높았고, 지금도 [[제20대 대통령 선거]] 낙선했지만 차기 대권을 바라보는 [[홍준표]]가 시장을 하고 있다.] 국세청장 자리는 예나 지금이나 [[요직]]이다.[* 국세청장 자리는 지금의 검찰총장에 비교해도 만만하디 않을 정도로 요직 중의 요직이다. 당시에는 국세청이 경제 안기부라는 별칭이 있었을 정도였고 시대상을 감안하면 안기부장에 못지않고 검찰총장보다 요직이던 시절이었다. --애초에 세금관리하는 곳의 수장이 힘이 없을 리가 없다.-- 박정희도 국세청장 자리에 최측근인 [[이낙선]]을 임명했다.] 하지만 허화평은 청와대 밖으로 나간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듯 하다. 이후 허삼수와 함께 [[미국]]에 체류하며, 헤리티지재단의 연구원으로 있다가, 1988년 [[노태우 정부]]가 출범하자 국책 연구소인 (재)현대사회연구소 소장에 부임하였으며, 2005년부터 '미래한국재단'으로 바꾸고 2007년 이사장으로 추대됐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포항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2년 [[김영삼]] 지지를 선언하며, [[제14대 대통령 선거]] 전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으나, 1995년 김영삼의 [[12.12 군사반란]] 및 [[5.18 민주화운동]] 관련 [[사법]] 처리 조치로 [[기소]]되었다. 이에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포항)|북구]]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옥 중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12.12 군사반란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유죄]] 판결을 받아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가 이후 [[사면]]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2000년)|민주국민당]] 후보,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2018년 [[KBS]]가 제작한 [[1988 서울 올림픽|서울 올림픽]] 개최 30주년을 기념해 만든 다큐멘터리 [[88/18]]에 출연해 올림픽 유치 배경 등을 술회했는데 이 때 했던 말이 잠깐 화제가 됐다. >'''"언제 대한민국이 준비해놓고 뭐 제대로 한 일이 있나요? 우리는 해놓고 봤다고. 우리는 그것 밖에 길이 없는 나라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