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허조 (문단 편집) == 집안 내력 == 허조는 그 자신도 깔끔한 처신과 강직함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다른 가족 구성원도 허조 본인 못지 않았다.~~알고보니 집안 내력~~ 허조의 형인 [[허주]](許周)는 허조보다 더 깐깐한 사람이었다. 허조가 형 대신 [[제사]]를 지내면서 제사 방식을 조금 바꿨는데, 허주가 이걸 듣고 "이렇게 멋대로 제사 방식을 바꾸는 건 집안 어른들과 조상님들을 무시하는 행동이다!"라고 화를 내고는 '''문을 걸어 잠그고 허조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 천하의 허조가 형의 집 문밖에서 며칠을 빌고 나서야 겨우 동생을 용서해 주었다고 한다.~~뛰는 허조 위에 나는 허주~~ 허주는 집안 예법뿐만 아니라 국사에서도 보기 드물게 엄정한 일처리를 선보였고, 기억력이 아주 좋았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니던 [[고려]] 말기부터 벼슬을 하면서 권세가들의 아부를 물리쳤고,[* [[이인임]], [[염흥방]], [[도길부]], [[임견미]] 등 여말의 세가들이 가진 초법적 권력을 감안하면, 이는 보통 배짱을 가진 원칙주의자가 아니고서야 행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당장에 저 염흥방도 원래는 신진사대부였다.] 태조 때는 [[노비]]변정도감의 도청사가 되어 개국 후 노비 문제 송사를 맡아보았으며 재판이 매우 공정했다. [[전라도]] 관찰사 때는 들은 일을 잊어버리는 법이 없어서 '일기 관찰사'란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명민하기까지. 동생 허조처럼 깐깐할 때는 깐깐하고 [[유교]]적 원리에 따라 인자해야 할 때는 인자한 사람이라서, 간음 및 살인죄와 같은 중범죄자가 아니라면 부녀자들을 옥에 가두지 말 것을 태종에게 건의한 적도 있다. 아주 실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태종 2년에 [[경상도]] 안렴사로 있다가, 새로 개간한 땅을 측량하고 보고하지 않은 죄로 다른 안렴사들과 탄핵을 당한 뒤 귀양을 가는 실책을 범한 바가 있다. 그렇지만 이는 커다란 결격사유는 아니었고, 실제로도 3년 뒤에 방면되어 복직한다.] 청빈함과 유능함을 겸비한 관료였던 셈인데, [[통풍(질병)|통풍]] 질환이 심한 탓에 말년에는 16년 동안 커리어가 비어 있었으므로 세종 대의 조정에서는 별로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원로 인사였다. 이 때문인지 허조는 늦게나마 정승 반열에 올랐으나 허주는 판한성부사[* 오늘날로 치면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직책. 1469년 명칭이 판윤으로 고쳐진다.]를 끝으로 중직을 맡지 못했다. 동생 허조보다 1년 늦게 82세로 죽었다. 풍을 앓지 않았다면 정승이 되어 세종 시기 또 하나의 명신으로 알려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허주의 아들로 허조에게는 조카가 되는 허성(許誠) 역시 뛰어난 인물이었고 집안 사람들을 닮아 매우 엄격했다. 예문관 대제학,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태종과 세종에게 큰 신임을 받았다. 태종 때인 [[1411년]] 사헌 지평에 임명된 이래 태종이 그의 강직함을 마음에 들어하여, [[1421년]] 태상왕 태종이 연회 자리에서 허성에게 춤을 추게 하고는 세종에게 "이 사람은 나의 어진 지평이다." 라고 소개했을 만큼 아꼈다. 주로 간관직을 역임하며 활약했는데, 세종의 대신들 가운데엔 구설수에 오를 만한 비위행위를 저지른 이들이 많고 사소한 실수를 한 이들은 셀 수도 없지만, 허성은 도덕적 흠결이라 할 것이 전혀 없음은 물론 심지어 일을 잘못해 물의를 일으킨 기사조차도 없어 이상할 정도. 허성은 오랫동안 간언을 잘했기에 여러 논의를 한 것이 많은데, 그 중 재미있는 것이 세종 시대 재상들의 고충을 암시하는 다음과 같은 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da_10911012_004|세종 9년 11월 12일]]) 경연 때 기복(起復)[* 상을 치르느라 휴직 중인 신하가 상중에도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것.]에 관한 대목이 나오자 "근자에 기복한 신하가 한둘이 아닌데, 이러면 일부러 상을 짧게 하는 것이 유행이 될 수 있으니 신중하게 하셔야 합니다." 하고 간언하는 장면이 있다. 이런 말이 나왔을 정도로 세종 시대 노신들의 고충이 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 '''같은 날'''에도 이미 황희는 기복 좀 그만 하면 안 되겠냐고(…) 세종에게 청했다.] ~~역시 대신 쓰기를 돌같이 한다~~ 허후와 허눌은 허조의 두 아들이다. 허후는 세종 재위 말기에 예조참판, 예조판서를 지내는 등 아버지와 비슷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문종(조선)|문종]] 때 [[김종서(조선)|김종서]], [[정인지]] 등과 함께 고려사를 수찬하고, 세자이던 [[이홍위|단종]]의 빈객을 맡는 등 김종서와 [[황보인]] 등의 고명대신들과 함께 보좌한다. 그 자신이 고명대신으로서 문종의 유지를 이은데다가 이들 원로대신들과 친분이 있었음에도 불과하고 [[계유정난]]이 일어날 때 당시에는 살아남았으나,[* 허후가 이때 어떻게 살아남았는지에 대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 '전날 세조에게 진언했던 일로 죽음을 피하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 [[단종실록]]에 기록된 일화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홍위|단종]] 즉위년에 [[수양대군]]이 환관 [[전균]]과 술을 마셨는데, 허후가 들어오더니 취한 채로 "[[안평대군]]을 치소서.", "형제가 화목하소서." 등의 발언을 했다. [[http://sillok.history.go.kr/id/kfa_10009119_004|단종 즉위년 윤9월 19일]] 이 일화만 놓고 본다면 '실은 허후 역시도 수양의 편에 서고 싶어했으며, 그 때문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기야 하다. 그러나 다른 기록들에서 허후는 명백히 고명대신들의 편에 서 있는 인물인데다 후술하듯 실제로 나중에 세조에게 교형을 당하므로, 이 술자리 일화는 모순되는 바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대군과 환관이 술자리를 갖는 상황에서 사관이 입시해 있었을 리는 없다. 세 당사자인 허후, 세조, 환관 전균 중 세조는 말할 것도 없으며, 허후는 실록을 집필할 때쯤에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 말이 없다. 남은 전균은 성종 때까지 권세를 누린 친[[수양대군]]파 인사. 그렇다면 이 기사는 [[단종실록]]의 많은 부분이 그러하듯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좀 더 높다는 해석이 더 일리가 있다.] 정난 때 살해당한 중신들의 목을 효수하는 일 등에 대해 세조에게 반대 의사를 표하다 결국 [[황보인]] 등과 같은 당으로 몰려 [[교수형|교형]]을 당했지만, 역사에 그는 충신으로 남았다. 허눌은 공신인 허조의 아들이라 조정에 입조하기는 했으나, 능력이나 인성 면에서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않은 인물이라 별로 출세하지 못했다. 즉, 허조의 가문에서는 허조 본인도 그렇거니와 깐깐하고 위엄이 있는 청백리들이 많이 배출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