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허조 (문단 편집) == 죽음 == 음력 1439년 12월 28일에 세상을 떠났다. 죽기 직전에 [[유언]]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태평한 시대에 나서[* 다만 허조가 태어난 때는 태평한 때는 아니었다. 특히 그의 어린시절인 우왕 재위기는 왜구때문에 나라가 개판이 되고 있었다. 물론 본인이 입신양명 했을때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대략 세종 치세였으니 이보다 정확할 순 없다.] 태평한 세상에 죽으니, 천지간에 굽어보아도 부끄러운 것이 없다. 이것은 내 손자가 미칠 바가 아니다. 내 나이 70이 지났고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으며 [[세종(조선)|성상]]의 은총을 만나 간언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요약하면 "태평성대에 살다 죽으니 정말 행복하다. 살 만큼 살았고, 재상까지 올라도 봤고, 말 하는거 잘 들어주는 임금 모셨으니 여한이 없다." 정도의 의미다. 세종과 언쟁을 많이 벌이기는 했지만 세종에 대한 충성은 변함없었던 모양. 이 시대에는 열심히 간언을 하는 것이 충성의 상징이었고 지금도 무관하지 않다.[* 특히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신하가 임금에게 충언을 올리는 것은 필수이며 설사 왕이 충언을 들어주지 않고 벌하더라도 굴하지 않아야 했다. 물론 왕이 지나치면 [[반정|갈아엎어야]] [[역성혁명|한다고]] [[맹자|주장한 이]]도 있었다.] 허조가 죽던 날 허조의 형 허주가~~동생도 장수했는데 이분도 보통이 아니네~~ 허조의 방에 들어가 보니 허조는 혼자 웃고 있었고, 이어 허조의 부인이 들어가자 허조는 여전히 빙그레 웃고만 있었으며 아들 허후가 옆에 앉아 보고 있어도 웃고만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상하게 여긴 가족들이 허조를 자세히 살피니 허조는 웃음을 띤 채로 숨을 거둔 뒤였다고 전해진다. 유언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며 운명한 듯하다. [[고려]]가 망한 후 건국된 [[조선]]에서 직언이 필요한 왕들을 만나 소신을 분명히 하며 살아간 [[충신]]. --이후 생겨난 사화들을 생각하면 딱 필요한 알맞은 시기에 태어나 녹봉을 타먹으며 살아갔다-- 허조 이후 [[성삼문]], ~~[[조광조]]~~[* 조광조의 경우 논란이 많이 갈린다.], [[청음 김상헌|김상헌]], [[지천 최명길|최명길]] 등등 날카로운 눈으로 대처법을 간언하며 임금을 바로잡고 나라를 바로 세우려 한 충신들이 많이 나왔지만 시류에 부딪혀 무릎꿇거나 적절히 뜻을 굽히거나 숙청되거나 심지어 처형된걸 보면, 자기 뜻을 관철하며 정말 행복한 삶을 살아간 충신은 허조 뿐이라봐도 무방하다. 그의 묘역은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이천리에 있으며 현재 파주시 향토문화유산 제29호로 지정되어있다. 이 무덤의 역사도 참 기구한데, 허조 사후 그의 후손들이 계유정난에 휩쓸리면서 멸문에 가까운 화를 당하여 사실상 실전 상태에 있었다. 물론 주변 거주민들에 의해 정조 14년(1790) 신원복관 전까지도 한미하게 유지되긴 했으나 후손들은 산소의 위치조차 몰랐었고 한국전쟁 때 후손이 경암의 묘표를 보고 발견하면서 다시 재단장 되었다. 무덤 주변이 최신식으로 정리된 것도 이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