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허젠 (문단 편집) === [[반장전쟁]] ===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이 거행되고 [[동북역치]]를 통해 중국 통일이 완수된 이후, 10월 8일 19사단장에 임명되었으며 12월 [[주페이더]]와 함께 [[정강산 투쟁]]을 벌이고 있는 마오쩌둥을 토벌하라는 지시를 받고 6개 여단 3만명의 병력을 통솔하여 정강산에 대한 3차 토벌작전을 수행하고 정강산을 경제적으로 봉쇄했다. 하지만 1929년 1월 마오쩌둥이 [[펑더화이]], [[주더]], [[천이]] 등을 통솔하여 반격하는 통에 격퇴되었다. 하지만 더 이상 정강산 근거지를 유지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마오쩌둥은 정강산을 버리고 강서성 남부로 이동했다. 이후 19사단장 자리를 유건서에게 물려주고 직할 개편감축 제3분구의 주임위원 겸 신편 7사단장에 임명되어 형주에 주둔, 국민혁명군 제4집단군의 편견을 감독하였다. 그러던 중 1929년 2월, 양호 지역을 장악하고 호남에서 장제스의 세력을 제거하려는 군사참의원장 겸 우한 정치분회 주석 [[리쭝런]]의 지시로 [[루디핑]]을 대신하여 호남성 정부주석에 임명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호남 사건]]이다. 국민정부는 내전을 방지하기 위해 허젠을 신임 호남성 정부 주석으로 인정했으나 광서파와 장제스 사이의 입장 차이로 인하여 협상이 끝내 결렬되어 1929년 3월 장제스와 광서파 사이의 [[1차 장계전쟁]]이 발발하였다. 이때 허젠은 장제스의 회유에 넘어가 장제스의 편에 서서 광서군을 공격했다. 중원대전 중에 계군이 6,7월 장사를 공격하고 1930년 7월 [[창사 폭동]]으로 장사가 함락되는 등 허젠은 잠시 몰락의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장제스가 [[중원대전]]에서 [[옌시산]]마저 꺾으면서 [[반장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했고 줄을 잘 선 대가로 허젠은 이후 7년이나 호남성 정부주석으로 재직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