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허잉친 (문단 편집) === [[반장전쟁]] === 하지만 중앙의 권력 집중을 위한 정치분회 폐지와 더불어 군벌들의 군사력 기반을 감축시킨다는 편견이 진행됨에 따라 군벌들의 불만이 증대되었다. 결국 군벌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1929년 2월, 우한 정치분회 주임 [[리쭝런]]에 의해 호남성 정부주석 [[루디핑]]을 무단해임하고 35군 군장 [[허젠]]을 신임 호남성 정부주석으로 임명한 [[호남 사건]]이 발생했다. 허잉친은 채원배, 리쭝런과 함께 루디핑 파면에 대한 조사를 맡았다. 초기에 장제스는 이를 유화적으로 처리하려 했으나 계계와의 의견 차이가 끝내 좁혀지지 않아 결국 3월에 [[1차 장계전쟁]]이 폭발, 본격적인 [[반장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5월에 [[1차 장풍전쟁]]이 발발하자 방본인과 함께 타이위안에 파견되어 옌시산이 중앙을 옹호하도록 설득했고 9월에 [[장파쿠이]]가 반란, 계계의 잔당과 합세하여 [[2차 장계전쟁]]을 일으키자 광동 행영 주임에 임명되어 부친상도 무시하고 광동에서 장파쿠이와 계계군벌을 소탕했다. 1929년 8월 1일 난징에서 개최된 편견실시회의에 중앙편견구 주임 자격으로 참여, 8월 6일까지 7차례 회의에 참석하여 편견의 기준, 군대의 기본편제, 편견군대에 대한 안치(安置) 실시 방안, 편견 후 점검방안 등에 대해 논의하여 편견을 위한 구체적인 실시 방안과 기준을 만드는데 참여했다. 이후 1930년 3월 우한 행영 주임으로 이동, [[중원대전]]이 발발하자 호남에서 궐기한 리쭝런, 바이충시, 장파쿠이의 연합군을 분쇄하여 장제스의 신임을 다시 얻는데 성공했다. 1930년 12월 4일 행정원이 개조되면서 군정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31년 6월 15일 수정된 국민정부 조직법이 발표되면서 국민정부 위원에 재선출되었다. [[1차 양광사변]] 발발 이후 호남성 정부 주석 허젠의 요청에 따라 중앙군을 이끌고 호남성에 파견되어 공산당 소탕과 광저우 국민정부의 북벌을 저지하게 되었으나 1931년 9월, 형양을 점령하고 기세 좋게 진군하던 광저우 국민정부의 북벌군이 갑자기 회군하면서 본격적인 싸움을 벌이지는 않았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면서 장제스가 12월 15일 책임을 지고 사퇴하여 난징과 광저우 국민정부가 통합, [[린썬]]을 정부주석으로 [[쑨커]]를 [[행정원장]]으로 하는 신정부가 출범했으나 쑨커가 경제난과 일본의 침략을 당해내지 못하고 사퇴하면서 왕징웨이와 합작한 장제스가 군사위원장에 복귀하면서 [[장왕합작]] 체제가 수립, 다시 장제스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