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향찰 (문단 편집) == 상세 == [[이두]]나 [[구결]]에서는 그 어순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이두에서는 한국어 어순, 구결에서는 한문 어순] 한문 원문의 실질 형태소는 음독하고 조사, 어미와 같은 형식 형태소만을 차자 표기법으로 읽은 데에 비해,[* 석독 구결에서는 실질 형태소도 뜻으로 읽었다.] 향찰에서는 어순이 '''한국어 어순'''임은 물론 체언, 용언 어간과 같은 '''실질 형태소'''까지 차자 표기법을 동원하여 읽었다. 즉 표기만 한자일 뿐 가장 완전한 당대 한국어 문장이 된다. 하지만 이렇게 일반적인 이두보다 더 많은 정보를 함축한 만큼 이두나 구결에 비해 해독이 어려웠다. 향찰은 어디까지나 신라 고유의 시가 갈래였던 향가 전용 표기법이었기에 신라 멸망을 기점으로 쇠퇴기에 접어들기 시작하여 고려 중기부터 사용자가 급속히 줄었고 고려 말기 들어와서는 완전히 사장되었다. 또한 향찰의 '형태소'는 '이두 표기와 일대일로 대응'되지 않으며, 역사적 변화에 따라 크게 변화하기도 했다.[* 예컨대, 조사 矣와 亦은 향찰에서의 사용법과 고려시대 이후 이두의 사용법이 서로 판이하게 다르다.] 게다가 지금까지 전해지는 기록 중 향찰로 기록된 자료 자체도 매우 적은데, 당시 기록자들이 향찰로 기록하느니 의미 파악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그냥 한문으로 적거나, [[구결|한문에 중간중간 토를 달아서 기록하곤 했기 때문이다.]] 향찰은 가사를 따라부르는 것이 중요한 [[향가]]를 기록하는 데 제한적으로 활용되었으며, 그마저도 후삼국시대와 여요전쟁, 대몽항쟁 당시에 대부분 소실되어 극소수만 살아남았다. 향가 연구가 어려운 이유가 이 때문이다. [[일본]]에서 한자를 이용해 [[일본어]]를 표기하던 방식인 [[만요가나]]와 많이 비교되는 표기법이며, 향찰과 만요가나의 유사성이 일본의 학자들이 향가를 처음 연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