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향신료 (문단 편집) === [[중세]] === 이슬람 세력이 7세기 이후 북아프리카에서 아랍과 페르시아에 이르는 막대한 영토를 점유했기 때문에 아시아발 무역은 이슬람 세력이 독점하게 된다. 그렇다고 딱히 지중해의 무역이 끊긴 것은 아니었다. 초기 중세의 강국인 [[동로마]]의 경우 와인에 다양한 향신료를 넣어 마시는 것이 기본이었으며, 이슬람 세력에서는 향신료 장사로 부자가 된 수많은 상인들이 존재한다. 서유럽 역시 중세 초기 600여년이 끝나 11세기 중세 전성기에 들자 이슬람에서 향신료를 마구 수입해오기 시작한다. [[십자군 전쟁]] 이후로 동방과 교류가 활발해지자 동로마의 레시피도 수입이 됐고, 저지대 지역에서부터 이어진 서유럽의 국제 무역망을 따라서 포목이 이슬람으로 수출되고 향신료가 유럽으로 유입되는 지중해 국제 무역 시대가 열린다. 당시 이슬람 상인 역시 향신료 가격을 올리기 위해 [[신비주의]] 마케팅 전략을 펼쳤다. 이들은 [[아라비안 나이트]] 같은 곳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지어내 향신료가 비쌀 수밖에 없는 이유인양 퍼뜨리고 다녔는데, 예를 들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사실 이슬람에서 향신료를 유통할 때는 [[캐러밴]]으로 운반을 했는데, 육로로 운송했고, 거기에 수레를 쓰지 못하고 낙타에 실어야 했기 때문에 운송효율이 매우 낮았다.] >(중략)[[성경]]에도 여러 번 등장하는 [[계피]]에 대해,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실론계피를 아랍 지방에 있던 [[불사조]]의 둥지에서 발견했다고 적고 있다. 불사조의 둥지는 매우 가파른 곳에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갈 수 없었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놀라운 방법을 찾아냈다. 그들은 죽은 지 얼마 안 된 [[짐승]]을 큰 조각으로 잘라 불사조의 둥지 근처에 흩어 놓았다. 불사조들은 둥지에서 내려와 이 고기 조각을 물고 다시 둥지로 갔다. 결국 둥지는 [[고기]]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래서 [[아랍인]]들은 [[계피]]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피렌체의 상단이 남긴 상업 실무 서적에는 288가지의 'SPECIES' 품목이 있으나, 상기하였듯 아직 'SPECIES'라는 단어는 토산물을 뜻했기 때문에, 현대에는 향신료로 여기지 않는 것을 제외하면 향신료는 38개뿐이었다. 또 이슬람과 인도와 중국 등을 포함한 동방에서 수입되는 향신료는 31개뿐이었다. 13세기 무렵부터 오스만 제국이 부상하는 16세기 초까지 지중해 향신료 무역을 독점한 것은 유럽의 [[베네치아 공화국]]과 이슬람의 [[맘루크 왕조]]였다. 망해가는 동로마에게서 에게해의 섬들을 삥뜯어 식민지와 무역 거점으로 삼은 베네치아는 레반트 무역을 독점하였고, 맘루크는 홍해를 통한 인도발 무역로를 독점해서 지중해 국제 무역의 가장 큰 축을 분담했다. 둘은 서로의 영토에 상업거점을 설치했을 정도로 거의 절대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베네치아의 향신료 상인의 장부를 보면 수입물량의 80% 가량이 후추 수입이었고, 10~20%를 좀 넘는 분량의 생강 수입이 있었다. 그 외 기타 향신료는 나머지 10% 미만의 분량이었다. 나머지 10%에 해당되는 향신료는 희귀 향신료였는데, [[시나몬]], [[육두구]], [[메이스]], [[정향]] 등이 필수적으로 언급되었을 정도로 큰 마진율을 가졌다. ~~지금 육메가 대폭락이야~~ 향신료 무역의 이야기가 많이 와전되어서 [[후추]]의 가격이 굉장히 비싼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1차 사료를 직접 확인하면 후추는 향신료 중에서는 무척 싼 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5세기에 베네치아에서 120kg 후추 한 자루가 50~100두카트에 판매되었다. 그런데 베네치아 상인들이 레반트 지역에서 후추 매입가가 어땠는지 정확히 알기 어려운데, 36만 두카트 정도의 가치의 향신료를 23만 디나르에 매입했다고 하니 마진률은 50% 정도로 보인다. 수송 비용을 제외하면 순이익률은 30% 전후였을 것이다. 하여간 베네치아에서 도매 판매가 기준으로 계산하면, 100g 정도 후추는 당시 막노동자의 하루 임금 정도의 가치이니 완전 깡촌이 아닌 국제 교역망이 닿는 곳이면 서민도 어렵지는 않게 구경 가능한 수준이었다. 심지어 백년전쟁 시기 부르고뉴 공작은 죄수들에게도 후추가 들어간 요리를 먹였으며, 프랑스 요리책에서는 후추를 시골요리나 가난한 사람들의 죽에나 넣는 향신료로 취급했으며, [[영국 요리]]책에서도 '평민들의 위한 포도주' 레시피에 후추를 넣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대이슬람 무역에서 수입액의 50% 가량은 후추였을 정도로 후추는 많은 양이 수입되었다. 유럽의 후추 수요 때문에 [[맘루크 왕조]] 통치하의 이집트 지역은 후추 플렌테이션이 형성되었고, 맘루크 왕조의 카이로 상인들은 유럽과의 향신료 무역으로 막대한 돈을 벌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