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해적 (문단 편집) ==== [[위그노]] 해적 ==== >땅을 경작하는 농민은 없었다. 다만 모험을 좋아하는 신사, 무모한 병사, 불만을 품은 상인뿐이며 모두 진기함을 열망하고 한탕을 잡으려는 꿈에 부풀었다. >-드 콜리니가 포트 캐롤라인 식민지에 대해 한 말. 신대륙에서 보물을 싣고 오는 보물을 약탈하기 시작한 건 바로 프랑스 신교도, 즉 위그노 해적들이었다. 1523년 스페인과 프랑스가 전쟁 중일 때 '장 플로랭'이라는 사략선장은 스페인 해안에서 신대륙으로부터 보물을 싣고 오는 스페인선박 3척과 교전해 나포에 성공했는데, 어마어마한 보물을 보고 고무된 그는 다시 사략질에 나섰으나 스페인에 잡혀 해적으로 처형당했다. 프랑스 국왕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무시하고 자신도 한몫 챙기기 위해 스페인 선박과 스페인의 신세계 정착지에 대한 공격을 재가하여 태평양에서 스페인 선박과 식민지에 대한 끝없는 공격이 시작되었다. 장 플로랭이 죽자 프랑스 사략선원들은 스페인 대해의 항구를 공격해 보복했다. 푸에르토리코는 보물창고인데 요새도 없었고 하상(河床)에 위치해 취약하여 자주 공격당했다. 이후 프랑스 해적들은 아바나 항구를 급습했으며, 1544년 프랑스 해적의 카르타헤나 공격으로 습격자들은 약탈과 초토화로 한몫 챙겼다. 이후 프랑수아 르 클레, 르 클레의 부관 자크 드 소레 등이 잔인한 공격으로 악명을 높였다. 1550~60년대 말까지 위그노 해적들은 그 악명을 유감없이 떨쳤다. 위그노들은 끝임없이 스페인 대해를 공격했고, 지속적인 신교 탄압 때문에 망명한 신교도들은 플로리다에 개척지를 세웠지만 정착해서 안정화하는 게 아니라 보물을 노리는 자들뿐이었다. 계속된 습격에 진저리난 스페인은 결국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페드로 데 메넨데스 데 아빌레스'를 파견하였고, 그가 1565년 소부대와 함께 위그노 개척지인 포트 캐롤라인을 함락하여 포로로 잡은 프랑스 개신교도를 모조리 처형하고 나서야 위그노 해적들은 종말을 고했다. 대량 처형 후 만들어진 무덤에 데 메넨데스가 세운 게시물이 이들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나는 프랑스 인이 아니라 [[위그노|이단자들]]에게 이렇게 했노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