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항저우시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육화탑 중국.jpg|width=100%]]|| [[남송]] 시기 세워진 육화탑 풍경 [[춘추전국시대]]에는 [[월나라]]의 영역이었다. [[전한|한나라]] 당시에는 회계군의 일부였다. 이때만 하더라도 꽤나 오지여서 이 지역으로의 유배는 징역형에 비유될 정도였다. 후한 때부터 이곳은 [[쑤저우시(장쑤성)|쑤저우]]와 함께 오군(吳郡)에 속했는데 당시 항저우에 설치되었던 부춘현이 삼국시대 오나라 황실인 손씨의 본적지였기에 이곳 역시 중시되었다. 본격적인 이 지역의 발전은 [[7세기]] [[수나라]]가 건설한 [[강남(중국)|강남]] [[대운하]]의 종점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남송]] 때에는 임안(臨安)이라고 개칭하여 남송의 [[임시수도]]가 되어 [[북송]]의 수도 [[카이펑시|개봉]]에 못지 않은 번영을 누렸다.[* 언젠가는 반드시 화북을 수복하고 수도 개봉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임안은 남송이 멸망할 때까지 임시수도로 남았다. 그래서 임안의 궁성과 관청은 크게 짓지 않았고 남송 황제들의 능묘도 초라한 편이다.] [[원나라]] 때에는 [[마르코 폴로]] 등에 의해 킨자이(Khinzai)[* 임시수도를 가리키는 '행재(行在)'의 변형으로 남송의 임안이 바로 행재의 시조였다.] 등의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19세기]] [[태평천국 운동]]으로 인해 도시가 파괴되었고, [[난징 조약]]으로 인해 [[항구도시]] 겸 지역 중심지 기능을 [[상하이시|상하이]]에 내준 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최근 중국의 2선 도시 중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IT 산업, 친환경 녹색성장 산업 등 특색적인 산업과 1,00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소비 인구로 빠르게 성장을 하고 있다.[* 많이 파괴되었지만 난징, 광저우와 더불어 강남 지역의 중심지로 기능하던 곳이고 후한 때부터 꾸준히 개발되어 오던 곳이라 유동인구 자체가 많아서 성장의 동력을 잃지 않았다. 이에 반해 북송의 수도였던 카이펑은 국공내전과 문화대혁명으로 쑥대밭이 되어버려 현재까지도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 [[알리바바 그룹]] 창업주인 [[마윈]]이 사업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며 현재도 알리바바의 본사가 자리하고 있다. 친환경 녹색 도시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서인지 도시 곳곳에 전기차를 렌트할 수 있는 인프라도 구축되어 있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천당아래 분당 같은 느낌으로 중국에서 베이징, 상하이 다음가는 도시로 항저우를 꼽히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