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항우/평가 (문단 편집) === 정치적 능력 === >'''사람들이, [[초인목후이관|초나라 인간들은 원숭이 꼴을 하고 갓을 쓰며 사람 행세를 한다]]고 하던데, 과연 그랬군.''' >---- >한생, [[금의환향]]하겠다며, 중국 최대의 요충지인 관중을 버리고 서초로 돌아가는 항우를 비꼬며. 하지만 항우의 정치적 판단력은 최악이었다. 2년 만에 패기와[* 과장이 아니고 역사서의 기록을 보면 정말 '''항우의 패기에 제후들과 군중이 압도당해서''' 아무런 말도 못하고 항우의 뜻대로 흘러가는 것이 대부분이였으며 항우는 무력은 당대 최강이였고 그의 군세는 진격만 하면 질풍노도에 가까울 정도의 정예병이기도 하였다.] 군사적 능력만으로 제패한 중국 땅을, 4년 만에 정치적 실책으로 잃었을 정도. 이런 무식함은 그 말도 안 되는 전투력을 [[필부지용]]으로 만들었고, 전쟁은 아무리 만인지적이라도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의 또 다른 예시로 남고 말았다. 분봉 문제로 괜히 척을 져서 싸우지 않아도 될 세력을 적으로 만들어 버리거나[* 애시당초 분봉 이전의 문제로 항우에게 분봉받은 왕들은 전부 원래 세워져 있던 나라의 일개 장수급인데 항우의 소환에 응해 공을 세워 원래 있던 왕들을 쫒아내고 왕으로 삼았던 것이다. 즉, 처음부터 원래 있던 나라의 장수들을 하극상을 하게 만들었던 것. 이것만 해도 큰 문제인데 거기다 원래 있던 왕들은 명분을 가지고 있거나 전국시대 왕국의 직계 후손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항우가 분봉한 왕보다 지역 기반이 잘 닦여 있어서 분봉을 받았다고 해도 금방 원래 왕에 의해 쫒겨나는 경우도 많았다.] 봉건주의로 돌아가버렸으며, 잠재적인 적들을 줄인답시고 신안대학살과 같이 민초들을 학살하고 다닌 끝에 백성들한테 증오받아 민심을 크게 잃었고, 아군을 늘려도 모자랄 판에 항우의 질투심과 의심에 질려버린 천하의 인재들이 끝내는 항우를 버리고 줄줄이 적인 유방 측에 붙어버리게 만드는 등, 항우가 초한 대전 내내 보여주는 행보는 과연 그에게 대전략이라는 개념이 있었는지 의문이 들게 할 정도다. 정치적 능력과 연계된 전략적 개념에서 항우는 어이를 상실할 정도로 무능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라이벌]]인 유방이 스스로 항우에게 맞서 [[지구전]]을 펼치고, 한신을 보내 북방을 평정하고 여러 제후들을 하나하나 끌어모아 [[소모전]]으로 항우의 전쟁 수행 능력 쪽을 고갈시킨다는, 시대를 한참 앞서간 [[총력전]]을 실행한 것에 비하면 항우는 "일단 눈 앞에 적이 있다면 때려 부수고 보자"는 전쟁이라고 보기 힘든 '전투'의 관점으로 전쟁을 벌였다. 심지어 그 유방 하나에게만 제대로 집중하는 것조차 하지 못했는데, 전반적으로는 자신에게만 세력을 집중시킨 나머지 정작 태연히 후미를 치러 온 팽월을 제때 막지 못해 식량과 무기 보급 문제로 몇번이고 본진과 최전방을 오가야했기 때문이고 후반에는 상술한 대로 한신이 유방 휘하에 들어가는 것을 막지 않았던 것이 점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 것이다.[* 뒤늦게 용저에게 20만이나 되는 대군을 보내 막으라 했는데 이 말은 반대로 하면 더 빠른 시점에서도 20만까진 아니라도 대군을 보내 막을 수 있었단 소리다. 게다가 그 20만은 한신과 이 지역 군세에 참패하고 용저는 생포당한 뒤 참살당했다. 실제로 한신이 아직 제대로 점령/설득하지 못했을 초창기였으면 적어도 지역 전체를 상대하진 않았어도 됐으니 형편없이 참패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만 상대가 이미 [[정형 전투|3만으로 20만을 박살내본]] 한신이라서 이렇게 했어도 어떻게 됐을진 또 모른다.] 또한 유방이 관중, 파촉에서의 지원은 물론 형양 북쪽 오창이라는 교통의 요지 지역까지 확보해 식량 보급을 원활히 한데 반해 항우는 지역 자체는 식량 보급이 문제있는게 아니었음에도 끝까지 팽월 하나에게 발목이 잡혀 식량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몇번 만나서 부딪힌 적은 있었고 이 때마다 승리하긴 했지만 애초에 팽월은 유격전을 주로 하는 장군인지라 항우와 만나면 직접 맞상대하지 않고 전력을 최대한 보존해 살아돌아갔기에 이 승리는 크게 의미가 없었다.] 결국 초나라라는 국가는 [[소하|총력전에서 뒤떨어지고]] [[팽월|항우가 없는 곳에선]] [[고제(전한)|패배만을]] [[한신|거듭하며 피해가 누적된 끝에]] 결국 붕괴하고 말았다. 종합적으로, 거시적인 안목이 전혀 없는 인물인 건 확실하다. 유방으로부터 관중을 빼앗은 뒤 여러 부하들로부터 관중에 대한 전략적인 이점[* 관중은 4방향이 거대한 산으로 둘러싸여 함곡관, 무관과 같이 수도의 관문 역할을 하며 폭이 좁은 지형에 요새들이 있어서 방어에도 용이했고 교통의 요지인 점과 위수라는 강지대가 있어 곡창도 나오는 만능지형이기에 불로불사에 집착해 미쳐가기 이전의 시황제는 물론 13개 왕조가 관중을 수도로 삼을정도로 천혜의 땅이었다.][* 거기다 춘추전국시대를 제패한 진나라의 유산은 아직 건재해서 당시 관중의 경제력은 어마무시했다. 당장 고제는 관중에서 나오는 경제력으로 항우를 상대해서 승리했으니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의 설명을 듣고도 관중을 버리고 진을 멸망시켰다는 것을 고향에 자랑하기 위해 천혜의 지형 관중을 버리고 팽성을 도읍으로 삼아 되돌아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항우가 취한 행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사실 관중과 함양을 버린 이유도,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진왕 [[영자영]]을 참살하고, 진군 20만을 관리나 식량 문제로 묻어버린 [[신안대학살]]로 인해 관중 땅의 수많은 백성들을 적으로 돌렸으며, 그것도 모자라 함양을 약탈하고 불태워 장차 도읍으로 삼기는 커녕 자기 손으로 박살을 내버려 관중에 정착한단 선택지를 스스로 불태워버린 데에서 기인한 것을 생각해 보면 애시당초에 그에게는 정치적 고려나 식견이 없었단 걸 보여준다.[* 가정론이나 만약 항우가 관중을 새 도읍으로 삼고 유방을 파촉으로 봉했다면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수 있다. 파촉과 관중은 험난한 산맥을 경계로 한 지역이라서 유일한 길이 잔도였기에 감시에도 용이했다. 일찍히 항우의 명성도 있으니 관중에 진 삼왕이 아니라 항우가 있었더라면 유방이 바로 상대하기 보다는 기회를 엿볼수 밖에 없을테고 전쟁이 난다 한들 4개의 관문에서 농성하면 구강왕 영포를 위시한 친 항우 장수들이 구원을 오면 위기에 빠지는 것도 유방이었을 터이다.] 유방이 함양에 입성한 뒤 장량과 소하 등 책사들의 진언에 귀를 기울여 약탈을 엄히 금하고, 아예 건들지도 않고 함양성을 지켜냈다. 이렇게 유방이 약탈을 통제하는 와중에 후일 승상이 되는 [[소하]]는 진나라의 승상부와 어사부를 비롯한 주요 행정기관들의 각종 지도와 행정 문서 및 도감, 자료를 손에 넣어 장차 천하 공략에 필요할 각종 지리, 행정자료, 통계 등을 활용할 수 있게 한 것과 큰 차이가 난다. 그리고 이후 분명 허수아비지만 자기 위에 있었던 초 [[의제(초)|의제]]를 무시하고 멋대로 제후들을 분봉하였으며, 끝내 의제를 암살하고 자신에게 반기를 들거나 저항하면 학살하는 모습은 항우의 국가관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게다가 자신의 심복에 대해서도 제대로 신용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진평]]에게 제대로 이용당해 유일한 책사이자 대외적으로라도 양아버지로 칭하기도 했던 [[범증]]을 스스로 버리기도 했다.[* 다만 이건 범증의 문제도 어느 정도 있는데, 범증은 성격이 상당히 괴팍하고 고집스러워서 [[홍문연]]때 반드시 유방을 죽이라고 몇번이나 우겼고 항우가 싫다함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밀어붙이려 했다. 물론 범증의 선구안이 결국 맞긴 했지만 이 당시 항우와 유방은 한나라 말기의 [[원소(삼국지)|원소]]와 [[조조]]같이 압도적인 세력 차이를 가지고 역학관계가 굳어진 상태라 여기서 암습까지 해서 스스로 굽히고 들어오는 유방을 죽여버리면 민심과 유력자들의 신용을 잃는 건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이때 암살이 결국 실패하자 항우의 면전에 대놓고 "니 성격이 그렇게 아이 같으니 결국 유방한테 잡혀 죽을 거다"라고 말하기도 했을 정도로 평소에 자기 역정을 못참는 인물이었다. 유방과 장량이 서로 자신을 굽히고 인정해서 별 불화가 없던 것과 정반대로 범증과 항우 둘 다 자기 성깔을 전혀 억제하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 원래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서 주군과 가신이 되나 보다.~~ 진평은 원래 있던 갈등을 벌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는 해도 이제까지 아부라 부르며 사실상 항우 진영의 브레인 역할을 하고 명분을 제공해 주었던 범증을 고작 진평의 사소한 술수 만으로 의심해서 결국 분사하게 만드는 건 아무리 범증의 성격이 괴팍하다고 해도 이걸 어떻게 봐야 할지... 무엇보다 인재를 이런 식으로 대접하면 그렇잖아도 없던 인재가 더 떨어져나갈 것은 불문가지다.][* 사실 진평의 계략으로 범증이 쫒겨난 건 사실이지만 실제로 보면 오히려 범증이 분을 못 참고 뛰쳐나왔다가 죽은 형국이다. 아무리 그래도 항우가 의심을 품긴 했지만 범증이 말로 무마하는 것 자체는 크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 의심을 받았다고 스스로 나와서 분사까지 할 정도면 범증의 성깔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갈 정도다. 그나마 범증이 이렇게 죽은 덕택에 항우도 더 이상 다른 장수들을 의심할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 오히려 잘 되었다고나 할까...] 이런 모습을 보면 항우는 "천하를 아우른다."는 의미보다는 마치 [[전국시대]]의 개념으로 진나라를 대했다. 타국을 정복하고 [[외국인]]을 학살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것으로, 본래 관중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던 강소성 출신 유방이 관중의 사람들을 위로해서 인심을 후하게 산 부분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부분. 각 국가 간의 배타적인 소속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던 유방이 유독 특이했던 면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항우의 외국인 차별은 심한 수준이었으며 이 와중에 장한 등은 또 총애했으니 여기서도 일관성이 없었다. 이후 이어지는 분봉 조치도 마찬가지다. 이때의 모습으로 보면 항우는 [[중국]]의 [[통일]]이라는 개념에 대해 아예 이해를 못 하거나 혹은 조국을 멸망시킨 진나라 때문에 [[군현제]] 등에 극도의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사실 항우의 학살이 [[전국시대]]의 개념이라는 평도 무색한 게, [[백기(전국시대)|백기]]를 비롯해 전국시대에 학살자로 악명을 떨쳤던 장수들도 [[장평대전|전쟁 포로 등 군인을 학살하였지]] 민간인을 의도적으로 학살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 항우와 비슷하게 학살을 저지른 인간은 400년 뒤의 [[조조]]가 있는데, 그나마 조조는 항우보다 훨씬 더 뛰어난 정치적 능력을 갖추고 나중에는 민간인 학살을 어느 정도 자제했음에도 이 잔혹성이 발목을 잡아 중국 통일에 실패하고 중국에서도 항우 못지 않은 악인으로 평가받았다.] 숙부인 항량이 옹립한 의제가 관중왕 약속을 어기고 멋대로 차지한 자신을 비난한다는 이유로 죽여서 자기 발판을 무너뜨린 작자가 항우다. 훗날 [[조조|위 태조]]가 [[헌제|실권은 없지만 존재만으로 자신에게 명분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군주]]를 어떻게 다뤘는지만 봐도 항우의 선택은 한심한 수준이라 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의제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양치기 신분으로 그 출신이 의심스럽다 해도 자신의 숙부인 항량이 직접 찾아 모셔오며 초나라 왕으로 받들면서 정통성을 확보한 인물이었고, 항우가 의도적으로 의제를 배제하고 분봉을 통해 각지로 흩어버리기 전까지 초 회왕 밑에서 항우와 함께 싸운 군웅들은 그 속내가 어떠했건 간에 명목상으로는 의제의 신하들이었다. 거기다 항우의 견제로 의제는 제대로 권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항우의 뜻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 굳이 암살해야 할 힘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의의를 굳이 찾자면 항량 사후 항우와 척을 진 것에 대한 분풀이뿐이었다. [[항량]]이 의제를 옹립한 이유가 정통성에 있음을 볼 때, 아직 천하를 차지하지 못한 항우가 의제를 죽이는 것은 스스로 정통성을 차버리는 역적 인증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의 정치적 식견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 사실 [[항량]]이 죽은 상황을 이용해 아첨한 송의를 총애하게 된 의제로 인해 허무하게 실권을 찬탈당하는 바람에 자기 집안이 일으킨 군대에서 뜻대로 움직이기 위해 하극상을 저지른다는 어이없는 상황을 돌파하며 시작부터 관계가 꼬였던데다, 나중엔 홍문연까지 저지른 마당이니 의제를 제거한 것 자체는 불가피했던 면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 문제는 다들 보라고 왕들까지 동원해서 대놓고 의제를 죽여버리고 역적질을 벌이다보니 알아서 욕을 먹게 되었다는 것.][* 하지만 이미 이 시점에서는 항우가 모든 권력을 차지한 상황이었으므로 이미 명분만 남았을 뿐, 허수아비였던 의제를 죽일 필요는 없었다.] 오죽하면 [[초한전쟁|초한쟁패기]]까지는 그저 '옛날 이야기 속 미담'으로만 전해져내려오던 [[선양]]이, 항우가 남긴 오점 이후에는 선양을 하지 않으면 항우와 동급으로 싸잡아 [[폭군]] 인증으로 역사에 남겨질 것이 뻔했기 때문에 하나의 정치적 수단으로 굳을 정도였다. 실제로 초한쟁패기 이전의 하, 상, 주, 진 등의 왕조 교체도 전부 무력 정벌로 이루어졌지 선양 같은 (표면상으로라도) 온건한 방식의 천자 교체는 없었다. 그리고 초한쟁패 이후 [[왕망]]이 [[전한]]을 멸망시킨 시점에서 선양을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에 [[조비]], [[사마염]] 등이 반복하면서 필수적인 절차가 된다. 후한에서 조위로 넘어가는 시기에 조비가 9번이나 제위를 거절하며 선양 쇼를 벌인 이유가 바로 항우 때문이다. 이후 [[조조|위 무제 조조]]에게 사실상 예속된 [[헌제]]가 400년 통일 한 왕조의 정통성을 잇고 있던 것에 비해 초 의제의 존재감이 미약한 측면은 있었다곤 해도 의제를 살해한 건 엄연한 반역 행위였으며, 이는 일전에 항우와의 친분을 따라서 사실상 항우의 기분내키는 대로 이루어진 분봉 책정과 합쳐져 기존의 도리와 위계 질서를 완전히 붕괴시킴으로써 말 그대로 군사만 많이 모아서 깃발을 내걸면 어떤 인간이든 왕을 칭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난세를 열었다.[* 라고는 하지만 이것도 사실 원조는 진승과 오광이지 항우가 아니다. 문제는 항우는 이미 전국 패자에 가까웠으므로 진승과 오광과는 다른 스탠스를 취했어야 했는데 전혀 그러지를 못했다. 진승과 오광은 "왕후장상에 씨 있다더냐?"라고 주장했던 만큼 항우는 "나야말로 전국시대를 평정한 자이니 나와 내 후손만이 황제의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다."라는 것을 주장해야 하는데 전혀 그러지 못했고 그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 바로 초의제 살해였던 것. 즉, 항우가 초의제를 죽인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로 인해 세상이 어지러워진 것이 아니고 반대로 그로 인해 어지러운 세상을 혼돈에서 바로잡을 자격을 상실했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유방은 초한전쟁 후 [[숙손통]]을 스승으로 모시고 이런 위계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다. 항우 사후 반란을 일으켜 유방과 대치한 [[영포]]가 당당하게 "나도 황제 한번 해보려고 반란했다!"라고 유방에게 일갈할 정도로 초한전쟁에 이르러선 명분이란 것의 가치는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었고[* 하지만 이건 힘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거고 힘을 갖춘 인물이 명분까지 겸비한 경우에는 이 시대에도 명분의 가치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당장 황제 한번 하고 싶다고 나섰던 영포도 결국은 토벌당했고 이 문서에서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나오지만 명분을 등한시했던 항우는 그렇게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서도 결국은 유방에게 멸망하고 말았으니 명분의 힘은 결코 얕잡아 볼 만한 것이 아니다. 극도로 정치, 군사 체제와 전략이 발전한 현대에도 명분이 없다면 크게 불리해지고, 나아가 패한단 건 이미 수없이 증명됐다.][* 정확히 말하면 명분의 힘이 약해졌다기보다는 군웅들이 명분이라는 것을 얕보게 되었다는 점이 컸다. 한마디로 내가 힘이 있으면 명분이야 아무래도 좋다는 것. 하지만 애시당초 초나라 장군에서 출발해서 왕이 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의제를 데려온 게 항우의 숙부인 항량이었다.], 이런 상황을 만든 장본인은 바로 누구보다도 정치적 입지에서 앞서 있었던 항우였다. 특히, 자신의 숙적인 유방에게 엄청난 정치적 이득을 선사한다. 한마디로 원래라면 반란군으로 비난받아야 할 유방을 역적이자 학살자인 항우를 치는 의인이자 의제의 후계자라는 명분을 쥐어주었다.[* 유방이 출진할 때 한 노인이 의제의 죽음을 울면서 알리자 유방은 공분하여 의제의 제사를 지내고 자신이 의제의 후계자임을 공고히 했다. 또, [[광무 대치]] 때도 유방은 의제를 살해한 사실을 두고 항우를 크게 꾸짖어서 한나라군의 사기를 높였다. 설마 유방이 의제가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서 그랬을리 없음에도 이런 정치적 쇼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과 명분을 세웠기 때문에 결국 민중과 선비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항우를 토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만 하다 보니 하는 말이 앞뒤가 안 맞기도 했는데, 한 예로 의제를 쳐내면서 "회왕 그 자가 한 게 뭐가 있는가, 천하를 평정한 건 전부 나와 장수들의 공이 아니냐?"고 했지만 이 말을 한 게 약조대로 공적을 세운 유방에게 제대로 땅을 주기 싫어서였다. 그리고 분봉에서도 공적의 유무는 자신과의 친소를 잣대로 하여 맘대로 무시하였다. 의제는 공이 없으므로 대우해주지 않겠다면서 정작 공을 세운 사람들도 푸대접한 것.[* 물론 이는 항우가 자신이 [[콩라인|두 번째라는 것을]] 참아줄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런 것이기도 하다. 사실 홍문연 자체가 열린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때문인데(요컨대 자기보다 더 큰 공을 세운 유방을 함곡관을 잠근 일을 핑계로 삼아 제거하려 한 것) 정작 명분이 없어서 유방을 처치하는 것에 실패했고 진나라 멸망의 1등공신인 유방을 굳이 파촉에 묻어버리려 한 것도 사실상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심 가는 신하를 숙청하는 방식 또한 세련되지 못했는데, 대표적으로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장악한 마당에 굳이 초 회왕의 약속을 형식상으로나마 지키겠다며 유방을 파, 촉의 왕으로 봉했다.[* 나중에 항백의 건의로 한중까지 덤으로 받긴 한다. 항백이 일부러 적인 유방에게 이로운 짓을 한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항우가 한 짓은 워낙 치졸한 데다가 명분도 떨어졌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무마하지 않으면 안 될 수준이었다.] 이건 원래 [[홍문연]]에서 유방을 죽였어야 했는데 유방의 조리있는 변명과 [[번쾌]]의 대담한 시위에 의해 실패하면서, 유방에게 관중왕 자리는 주기 싫지만 그렇다고 죽이지도 못했으면서 그냥 내쫒으면 자신의 권위에도 손상이 올 것 같으니까 대충 얼버무리려 한 것이다. 또한 진평의 이간질 작전에 흔들렸을 땐 범증을 바로 실각시키거나 하다못해 구금하는 것도 아니고, 괜히 야금야금 자잘한 권한만 빼앗는 등 소심하고 이도저도 아닌 대응을 취하곤 했다. [[범증]]의 경우 바로 출사표를 내고 떠났으니 망정이지, 반역을 일으키거나 아예 유방에 투항해버렸다든가 항우와 대립각을 세워 다투었다면 다른 장수들과의 사이까지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쪽이 [[진평]]의 원래 노림수였을 테고. 결과적으로 범증만 떼어냈어도 성공한 것이였지만 말이다.] 때문에 항우에 대한 평판이 급속도로 나빠졌음과 동시에 비록 전장에서는 전무한 활약을 보였으나 '''되레 이기면 이길수록 점점 불리해지는 희한한 상황'''에 [[피로스의 승리|몰리게 된 것]]이다. 고위급 인사만이 아니라 일반 병사나 포로를 다룰 때도 마찬가지였다. 항복한 병력들을 데리고 있기 부담스러우면 무장 해제를 한 후 변방으로 내쫓아버리거나 하다못해 그들을 인질로 잡고 협상 테이블로 상대를 끌어오면 그만인데 항우는 오히려 [[신안대학살|모조리 죽여버리는 최악의 선택]]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