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함명수 (문단 편집) == 생애 == 1928년 2월 15일 [[평안남도]] 평양부(현 북한 [[평양시]])에서 아버지 함광덕(咸光德, 1911. 1. 19 ~ ?)과 어머니 [[강릉 최씨]](1913. 6. 25 ~ ?) 사이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6년]] [[해군사관학교]] 1기로 입학했다. 동기로는 전임 참모총장이었던 [[이맹기]] 제독과 후임 참모총장을 지낸 [[김영관(1925)|김영관]], [[장지수(군인)|장지수]] 제독, 한국전쟁중 전사한 이태영 해군 중령이 있다.[* 안타깝게 먼저 세상을 떠난 이태영 동기생에 대해 각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http://blue-paper.tistory.com/1241|관련글]] 소위로 임관한 뒤 [[충무공함]] [[부장#s-4|부장]]을 지냈고, 충무공함 3대 [[함장]], [[타코마급 호위함|PF-66 임진강함]]장, 제1[[전단장|전단사령관]], 작전참모부장 등을 거쳐 1961년에 한국함대사령관(지금의 [[해군작전사령부|해군작전사령관]])에 올랐다. 해군본부 정보참모로서 [[1949년]] 몽금포 작전을 기획하고 직접 지휘하던 중 총상을 입기도 했고[* JMS-301 함장 [[공정식]] 소령, JMS-302 함장 [[김상길]] 소령 등이 해당 작전에 참여했다. 당시 공정식 소령이 그를 구출하였고, 2015년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함명수 소령은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한국전쟁 당시 정보국장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첩보작전인 '''X-ray 작전'''을 위해 직접 공작대를 지휘하여 인천 지역의 정보를 유엔사령부에 전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작전 중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 1963년부터 64년까지는 동기인 이맹기 제독의 러닝메이트로 [[대한민국 해군참모차장|해군참모차장]]을 지냈고 이맹기 제독이 퇴역하자 이어서 해군참모총장에 올랐다. [[1966년]] 전역했고 후임자는 [[김영관(1925)|김영관]] 제독이었다. 해군참모총장 가운데 마지막 [[중장]] 전역자였다. [[김홍열(군인)|김홍열]] 제독이 여러 사정으로 인해 1년 정도 중장으로 참모총장 근무를 한 적[* 해군 중장급들이 [[하나회]] 문제 등으로 날아가버리는 바람에 소장이었던 김홍열 제독이 중장으로 진급해서 해군참모총장을 맡았다. 최저 복무기간 때문에 1년간은 중장으로 근무하고 임기 나머지는 대장으로 근무했다.]이 있긴 하지만 최종 계급은 대장이었다. 이후 한국수산개발공사 사장과 한영공업주식회사 사장 등을 지냈고 제9대, 제10대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을 지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