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할복 (문단 편집) === [[에도 시대]] === 위에서 설명했듯이 '스스로 배를 갈라 죽는다'는 행위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배를 가르는 행위' 자체가 형식화되어 버렸다. 나중에는 아예 할복 시행 시 '''칼 대신 [[부채]]를 줘서 배를 긋는 시늉만 하는 식이 일반적이게 되었다.''' 설령 칼을 쓴다 해도 할복할 사람의 '''[[초살|손에 칼 손잡이가 닿기도 전에 목을 베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물론 상술했듯 할복이라는 행위 자체가 어렵기도 하거니와 고통도 상당하니... 이러면 그냥 참수형이랑 다를 게 뭔가 싶기는 하지만, 형식적으로나마 죽기를 스스로 선택했다고 보아 할복으로 인정하였다.[* 여담으로 이는 조선의 [[사약]]과도 유사했다. 사약도 지배층 한정으로 베풀어주는 특별대우였지만, 할복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면 사약은 그 살상률이 낮은 관계로 일단 사약을 내리지만 사약 먹고 안 죽으면 현지에서 교살(교수형)하기 일쑤인데다 할복처럼 사약도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고통이 장난이 아니었다. 할복이야 배 가르는 것이라서 그에 따른 고통이라면 사약은 약빨이 잘 받게 만들기 위해서 군불을 지핀 방에 들어가게 만드렀는데 문제는 '''그냥 무작정 뜨겁게 때웠기에''' 뜨뜻하다 정도가 아니라 무척이나 뜨거웠다. 거기다가 사약이 살상률이 낮은 만큼 즉각적으로 효과가 도는 것도 아니라서 약이 돌아도 즉각 쓰러져 죽는 게 아니라 온갖 증세를 다 겪다가 죽었을 것이라고...] 원래부터 [[사무라이]]라는 것이 시험으로 뽑는 것도 아니고 그냥 무가의 자손이면 무조건 사무라이이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에도 막부]]에서 법적으로 인정하는 [[사무라이]]의 지위는 사무라이 본인과 그 대를 이을 장자뿐이었고, 차남 이하는 성인이 되어 다른 가문에 정식으로 출사하여 가신이 되기 전에는 사무라이로 인정하지 않고 [[로닌]]으로 불렀다. 그 유명한 [[신선조]]의 [[오키타 소지]] 역시 부친이 오슈 시라카와 번사였지만 매형이 [[데릴사위]]로 가문을 이었기 때문에, 막부에서 작성한 대원목록에는 신분이 로닌으로 되어 있다. 물론 사무라이를 무가에 속한 사람의 대명사로 보면, 틀린 얘기는 아니다.] 모든 사무라이들이 스스로 배를 가를 정도도 간이 큰 것은 아니었다. [[연좌제]]에 걸려 할복을 명령받은 대상 중에는 '''극히 드물게''' 코흘리개 어린아이도 있었으며, 이럴 경우에는 100% 부채 지급이었다. 아예 [[에도 시대]] 중기에 이르면, 이런 문제 때문에 복잡한 절차 거칠 것 없이 그냥 참수형을 집행한 다음, 서류상으로만 할복으로 보고하는 경우도 제법 존재하였다. 이렇다 보니 에도 후기부터는, 진짜 자기가 배를 가르고 죽었다는 것은 상당한 의지 표명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때문에 스스로 배를 가른 극소수의 '''진짜''' 할복은 숭고한 죽음으로 포장되는 경향이 더욱 강해졌으며, 이런 성향은 [[제국주의]] 시대까지 이어졌다. 진짜로 할복이 실행된 경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경우였다. 1. 사건 자체가 무사도와의 관련성이 매우 높고, 세간의 상당한 주목을 받는 경우. 1. 형벌로서의 할복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행하는 [[자살]] 형태의 할복. 개중에서도 진심으로 자신의 의지를 표명하는 경우. 1번 케이스로 유명한 경우가 바로 [[추신구라]] 사건이다. 사건을 일으킨 46명의 낭인은 이후 할복을 명받았고 그중 10명의 할복이 [[모리]] 가문의 저택에서 이루어졌는데, 할복에 대한 온갖 뻥튀기 기록들이 존재하는 와중에, 이때의 기록은 과장된 점 없이 매우 객관적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모리의 가신들이 '''처음에는 부채를 주었다'''[* [[신선조]]의 [[야마나미 케이스케]]는 당시 부채를 집는 풍습이 퍼졌음에도 무사답게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는데 이를 본 막부의 관리가 [[단도]]를 사용하라고 요구하여 결국 진짜로 배를 찌르는 퍼포먼스가 연출되었고, 10명 중 특별히 기록될 만한 케이스는 단 2건으로서, 하나는 할복 직전 카이샤쿠에게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인사한 것과, 나머지 하나는 '''정말로 깊게 배를 갈랐다'''는 것이라고 한다. 즉 대부분의 경우 인사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벌벌 떨었다-- 긴장했으며, 제대로 배를 가른 자도 별로 없었다는 이야기. 이는 진짜 제대로 된 할복은 소수에 불과했다는 방증이다. 또다른 1번 케이스로 [[막말]] 유신지사 [[다케치 즈이잔|다케치 한페이타]]의 할복이 있다. 한페이타는 [[도사 번]]의 [[가로]] 요시다 도요를 암살한 죄로 할복을 하게 되는데, 이때 카이샤쿠역을 맡은 자에게 "내가 명령을 내리면 목을 치라"고 부탁한다. 할복장에서 단도로 처음 배를 가르자 카이샤쿠역이 목을 치려 하자 '아직이야!'라며 말렸고, 다시 한번 배를 가른다. 이에 카이샤쿠역이 목을 치려 하자, 또 말리며 3번째 배를 가른 후 죽는다. 이 모습을 본 도요의 조카인 고토 쇼지로[* 보수파였지만 나중에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다.]와 쇼지로의 친구 이누이 다이스케는 "한페이타의 최후가 장렬하다"고 말했는데, 적에게 삼촌을 잃은 조카와 그 친구마저 적의 할복이 장렬하다고 인정한 것이다. 대부분의 할복이 장렬했다면 굳이 그렇게 말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므로, 이는 진짜 제대로 된 할복은 소수에 불과했다는 또 하나의 방증이다. 2번의 경우 역시 극히 드물었다. 사실 자살 형태의 할복 또한 대부분의 경우 할복자가 "나 할복한다"고 선언한 뒤, 실제로 배를 가르지는 않고 카이샤쿠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일은 대체로 주군인 [[다이묘]]가 죽은 뒤 가신들이 따라 죽는 [[순사]]에서 벌어졌다. 사실 순사란 것이 충성과 도리라는 포장은 되었으나, 그 이면에는 경제적 · 정치적 이익[* 순사자가 나온 가문은 포상을 받고 남들에게 존경받았다. 이것이 가문에 얼마나 큰 이익이 될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조선시대]]에 [[열녀]]를 강조해서 열녀가 '양산'되었던 것과 비슷하다.]이 따랐기 때문. 실제로 17세기 무렵 순사자가 너무 많은 것에 골머리를 앓은 막부가 "순사자의 가문에게 벌을 주겠다"는 포고령을 내리자, 순사는 그 즉시 소멸했다. 실상이 이런데 당연히 진짜로 배를 가르는 자들은 극소수에 불과. [[조선]] 유학자로서는 유일무이하게 17세기 초반 [[사무라이]] 문화를 관찰할 수 있었던 [[강항]]은 당대 유행하던 할복을 통한 [[순사]]가 겉으로만 요란할 뿐 사실은 다른 속내가 있음을 간파하고, "겉으로는 주군을 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전혀 아니며, 자신의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다"고 논하였다. 강항이 이렇게 말한 까닭은 [[순사#s-2]]의 설명을 참조할 것.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에도 막부]] 측에서 막부의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말기 양자[* [[다이묘]]가 죽기 직전, 죽은 후에 양자를 들여서 가문을 잇게 함으로서 가문이 끊기지 않도록 하는 것.]를 금지하려 하거나 사소한 것을 구실로 [[가이에키]][* 개역改易(かいえき), 무사의 봉록을 모두 빼앗고 평민으로 강등하는 것.]을 하려고 하는 경우, 지방 쪽에서 막부가 개입하지 못하도록 선수를 쳐서 다이묘의 [[가신]]급에서 할복을 해버리는 경우 또한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런 경우는 할복이 아니라 책임회피용 [[자살]]내지 빠른 형집행. 하지만 명목상으로는 할복이기 때문에 막부에서도 어쩔 수 없이 사후 처리를 관대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사건이 너무 크다면 설령 할복을 했어도 다이묘 참수+개역 크리를 먹이는 경우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