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흥교 (문단 편집) === 국내와 만주에서의 활동 === 1927년 부친 한규옹이 병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그는 차남 한형석만 중국에 남기고 가족 모두를 데리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한흥교는 조국으로 돌아가기 전 한형석에게 명주 [[태극기]] 한 폭과 고향에서 가져온 한 줌의 흙을 건네줬다. 귀국 후, 한흥교는 대동병원을 다시 운영하면서 가계를 돌봤다. 그러면서도 동래 지역의 민족, 사회운동에 관여했다. 당시 동래 지역의 사회운동은 청년 운동가들의 계속되는 검거로 침체되어 있었다. 그는 이러한 어려운 여건을 타개하기 위해 1930년 2월에 결설된 경오구락부(庚午俱樂部)에 참여했고 1931년 2월 간사로 선출되어 지역 사회의 일에 적극 참여했다. 한편 그는 [[삼천포]]에서도 대동의원을 개설하여 인술을 베풀었고, 그곳에서도 동지구락부를 설치해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다 1932년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만주로 향한 그는 1933년 만주 랴오둥성 좡허현 대고산에서 의원을 개업했으나 1936년 6월 폐업하고 그해 7월 조선민회 만주 통화성 류허현 주재 촉탁의로 임명되었다. 그러다 12월 공의(公醫)로 임명되었다. 공의는 일제강점기 말기 지원병 신체검사 등을 수행하며 일제의 녹봉을 받던 의사를 가리키던 명칭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한흥교에게 있어 불명예스러운 자리였다. 그가 이 일을 맡은 것은 곤궁한 살림을 타개하고 일제의 감시를 회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938년 9월 공의를 사임한 그는 1939년 8월 중국 산시성 타위안 청경루에서 태평의원을 개업했다. 그는 이곳에서도 무료 의료 활동으로 명망을 쌓았다. 그러던 중 한국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의 마하화복적후공작대와 접촉하면서 차남 [[한형석]]이 제2지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서로 연락이 닿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