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푸쥐 (문단 편집) === [[반봉사건]]과 [[국민혁명]] === 1925년 10월 펑위샹의 지시로 국민군 대표가 되어 일본에 보내 견학을 했는데 이때 [[테이코쿠 호텔]]에 투숙하던 중 [[봉천군벌]]의 대표 [[궈쑹링]]을 만나게 되었는데 궈쑹링은 이런 얘기를 했다. >"이상하고 야릇한 일이 하나 생겨 당신과 이야기를 좀 나누려고 합니다. 이번에 내가 막 [[도쿄]]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일본 참모본부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직원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와 몇마디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묻습디다. '당신이 이번에 일본에 온 것은 [[장쭤린]] 장군의 밀약 체결 임무 때문에 대표로 온 것 아니냐?' 그래서 내가 '아니오. 단지 견학하러 온 것 뿐이오. 다른 임무는 없소. 더욱이 밀약 체결의 일은 알지도 못합니다.' 그랬더니 그 일본인은 풀이 죽어 나가 버립디다. 당시 나는 영문을 알수 없어 '이게 도대체 어떻게 어찌 된 일인가?' 했습니다. 후에 자세히 들어보니 장쭤린이 그동안 감히 승인하지 않고 있던 매국적 [[21개조 요구]]를 승인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본에서 그 대가로 대량의 군사 무기 지원을 얻어 국민군을 공격하려는 것입니다. 장쭤린은 개인적 욕심에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고 국가를 팔아 먹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기르던 호랑이 고기를 베어 늑대를 제집에 끌어들이는 격이니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나는 양심에 따라 일을 할 뿐이며 그가 만일 국민군을 공격하면 나는 그를 공격할 것입니다. 오늘 담화 내용은 비밀을 지켜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말하지 마시오." 이에 한푸쥐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곽 선생의 인격에 한층 존경심을 표합니다. 제가 돌아가면 분명히 선생의 뜻을 펑위샹 선생에게 전하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11월 5일 귀국한 한푸쥐는 수원 특구의 포두로 돌아와 펑위샹에게 궈쑹링에게 들은 말을 전했다. 마침 장쭤린의 논공행상에 불만이 많아 [[손봉전쟁]]을 일으켜 장쭤린에 맞서는 [[쑨촨팡]]과 합작할 생각을 하고 있던 펑위샹은 반색하며 궈쑹링과 합작을 꾀하여 11월 6일, 한푸쥐를 톈진에 파견하여 궈쑹링과 협상하게 했다. 이에 펑위샹 및 열하독판 [[리징린]]과 결탁한 궈쑹링은 1925년 [[반봉사건]]을 일으켜 장쭤린과 [[양위팅]] 타도를 기도했으나 [[관동군]]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이때 펑위샹과 한푸쥐는 국민군 2군의 악유준이 동맹인 리징린을 공격하는 난리가 벌어지는 바람에 궈쑹링을 돕지 못했다. 1926년 [[직봉풍전쟁]]이 발발했으나 [[옌시산]], [[우페이푸]], [[장쭤린]]이 연합하여 펑위샹을 두들기는 통에 박살나버렸다. 이후 1927년 [[펑위샹]]이 [[국민혁명]]에 가담하면서 [[중국 국민당]]에 가입하고 [[국민혁명군]]으로 편제되었으며 3방면군 총지휘 겸 6군 군장에 임명되어 하북을 공격했다. [[국민당의 2차 북벌]]에서 국민혁명군 2집단군 전선총지휘 겸 3방면군 사령관 겸 6군 군장에 임명되어 북벌에 나섰다. 통일이 완수된 후 [[편견회의]] 결과에 따라 20사단장 겸 하남성 정부주석에 임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