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푸 (문단 편집) == 한푸와 호복, 한복과의 관계 == 중국은 고립되어 독자적으로 성장한 나라가 아니라 여러 국가와 교류를 하면서 문화를 융합하면서 성장한 나라이므로 복식인 한푸 역시 주변 민족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 '''新羅之初(신라지초)''' : 신라 초기의 > '''衣服之制(의복지제)''' : 의복제도는 > '''不可考色(불가고색)''' : 색채에 대한 고찰이 불가능하다. > '''至第二十三葉法興王(지제이십삼엽법흥왕)''' : 제 23대 법흥왕 때 > '''始定六部人服色尊卑之制(시정육부인복색존비지제)''' : 처음으로 6부의 복색의 존비제도를 정하였다. > '''猶是夷俗(유시이속)''' : 그러나 그 때까지는 오히려 동이의 풍속을 유지하였다. > '''至眞德在位二年(지진덕재위이년)''' : 진덕왕 2년에 > '''金春秋入唐(김춘추입당)''' : 김춘추가 당에 가서 > '''請襲唐儀(청습당의)''' : 당의 의식을 따를 것을 요청하였다. > '''太宗皇帝詔可之(태종황제조가지)''' : 당 태종(오기. 실제로는 당 현종이다.)이 이를 허락하고 > '''兼賜衣帶(겸사의대)''' : 동시에 의대를 주었다. > '''遂還來施行(수환래시행)''' : 그가 돌아와서 이를 시행하여, > '''以夷易華(이이역화)''' : 우리의 풍속을 중국의 풍속으로 바꾸었다. > '''文武王在位四年(문무왕재위사년)''' : 문무왕 4년에는 > '''又革婦人之服(우혁부인지복)''' : 또한 부인의 의복제도를 고치니, > '''自此已後(자차이후)''' :이후로 > '''衣冠同於中國(의관동어중국)''' : 우리의 의관이 중국과 동일하게 되었다. > ---- > 삼국사기 신라본기 이 구절은 삼국사기 의복지에 나오는 내용으로, [[신라]]가 관복으로 복두와 반령포를 제정할때 내용이다. 해당 구절은 중국의 [[키보드 워리어|극단적 민족주의 성향 누리꾼들]]이 한국의 전통의복인 한복을 격하시키기 위해 고려시대 삼국사기 중 신라본기 의복지에 등장하는 구절을 가지고 한복을 한푸의 일부로 취급함과 동시에 동아시아 모든 의복의 시원(始原)을 한족의 한푸라고 왜곡하고 있는데, 이는 [[모순|역대 중국 사서와 기록, 심지어 현대 중국의 의복 전문가들에게도 부정되는]] 개념이다. 당장 하술할 중국 민족주의자들의 한푸 역사왜곡을 반박하는 논문들부터가 죄다 중국 논문이다. 즉, 중국에서도 이들의 주장은 억지 취급이라는 소리다. || [[파일:중국논문.jpg|width=100%]] || 첨부자료의 내용은 중국인이 생각하는 오사모, 반령포 허리띠, 목화신발등 옛 관원이 입었던 관복은 [[남북조시대]] [[북조]] 이후로 등장한 옷으로 그 이전 시대에선 볼 수 없었던 것으로 호복(胡服)에 해당하는것들이라고 설명하며, 이는 몽계필담의 구절인 '''中國衣冠自北濟以來 乃全用胡服''' 이라하여 '''중국의 의관은 북제이래로 호복을 모두 썼다라는 뜻이며''', 주자어류에서는 '''今世之服 大抵皆胡服'''이라고 하여 '''오늘날의 옷은 모두 호복이다''' 라고 진실을 말하고 있다. 이는 고고학적인 연구와 유물로도 증명된 자명한 사실이며, 조선시대 우리가 전통으로 지켜온 관복도 한푸와는 관계없는 호복이 중원을 거쳐 수입된 것으로 한푸와는 관계가 없는것이다. 즉 중원은 그당시 한족만의 활동공간이 아닌 큰 냄비와 같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