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창수 (문단 편집) === [[경술국치]] 이후 === 일제 강점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한일합병에 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10년]] 10월 7일 발표된 남작 작위 수여 대상자에 포함되었다. 같은 해 10월부터 11월까지 일본의 ‘천장절’에 즈음하여 조선귀족관광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911년]] 1월 13일 일본 정부로부터 2만 5천원의 은사공채를 받고, [[1911년]] 4월 24일 조선귀족회의 결성에 참여하고 간사로 선정되었다. [[1912년]] 8월 1일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고 12월 종5위에 서위되었다. [[1910년]] 10월부터 [[1912년]] 8월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 그리고 [[1912년]] 8월부터 [[1919년]] 10월 20일까지 중추원 고문을 역임하였다. 중추원 고문으로 재직 중 [[조선총독부]]가 조선인을 동화시켜 일본제국의 ‘신민’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추진하였던 ‘반도사 편찬사업’의 심사위원을 맡았다. [[1915년]] 11월 다이쇼 대례 기념식에 참석하여 다이쇼대례기념장을 받았고, 돌아와서 11월 25일자 『매일신보』를 통해 일본 천황을 찬양하고 한일합병의 당위성을 설파하였다. 같은 해 열린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의 경성협찬회 유공회원으로 100원을 출연하였다. [[1917년]] 10월 3일 조선불교옹호회 제1회 역원회에 참석하고 부회주로 선정되었고, 1925년 5월 재단법인 조선불교단의 부단장 및 이사가 되었다. 이들 단체는 조선 불교에 대한 일제의 영향력 확대와 조선인에 대한 사상 통제를 통한 ‘내선융화’([[내선일체]]) 보조를 목적으로 하였다. [[1919년]] 10월 20일 이왕직 찬시에 임명되었고, 11월 이왕직 장시사장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 26일]] ‘고 [[이등박문]]공 10년제’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제단에 참배하였다. [[1921년]] 6월 11일 조선산림회 창립총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10월 『[[매일신보]]』 5,000호 발행을 기념하는 축사를 통해 『매일신보』가 문화정치 선전과 일선융화에 앞장섰다고 평가하였다. [[1926년]] [[순종(대한제국)|순종]] 사후 ‘고 대훈위 이왕 장의위원’을 맡았고, [[1927년]] 4월 7일부터 [[1932년]]까지 이왕직 장관을 지냈다. [[1928년]] 11월 [[쇼와 천황]] 대례기념식에 참석하고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으며, 이어 돌아온 직후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지면을 통해“나는 지존을 지척에서 모시어 그 장엄 고아한 성전을 배관할 때에는 요순시대를 다시 만난 것 같은 감격에 겨워 눈물에 목이 메었습니다.”라는 소감을 피력하였다. [[1929년]] 9월 조선 귀족들의 파산 구제를 목적으로 한 사단법인 창복회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경술국치 직후 [[친일파]]들은 [[조선귀족]] 작위를 받았는데 [[조희연(1856)|조희연]], 이기용, [[조민희(1859)|조민희]] 등이 파산하고 (조희연은 작위가 박탈됨), 민영린은 마약을 복용한 혐의로 작위가 박탈된다. 이러니 조선귀족들은 파산하지 않고 싶어했어서 이러한 조직을 만든 것.] 1913년 7월 21일 정5위, 1918년 10월 10일 종4위, 1924년 2월 20일 정4위, 1932년 7월 종3위까지 차례로 승서되었다. 1922년 9월 28일 욱일중광장, 1923년 8월 27일 훈1등 서보장, 1931년 8월 13일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1932년 7월 이왕직 장관직에서 퇴직하면서 일본 궁내성 궁중고문관에 임명되었다. 1933년 10월 7일 오후 12시 40분에 [[경기도]] [[경성부]] [[가회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자택에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310080023910100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3-10-08&officeId=00023&pageNo=1&printNo=4433&publishType=00010|사망하였다]]. 향년 71세. 사후 그의 작위는 한창수의 10촌 족형(族兄) 한철수(韓哲洙, 1832. 9. 12 ~ ?. 3. 4)에 입양된 장남 한상기(韓相琦, 1881. 2. 13 ~ 1934. 5. 6)[* 자는 사운(史雲).]가 세습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