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중왕표 (문단 편집) === 번역문[* 번역과 주석은 모두 [[https://pgr21.com/pb/pb.php?id=freedom&no=76447|이 글]] 참고.] === >평서장군(平西將軍) 도정후(都亭侯) 신(臣) [[마초]], 좌장군장사(左將軍長史) 영진군장군(領鎭軍將軍) 신 [[허정(삼국지)|허정]], 영사마(營司馬) 신 [[방희]], 의조종사중랑(議曹從事中郎) 군의중랑장(軍議中郎將) 신 [[사원]](射援), 군사장군(軍師將軍) 신 [[제갈량]], 탕구장군(盪寇將軍) 한수정후(漢壽亭侯) 신 [[관우]], 정로장군(征虜將軍) 신정후(新亭侯) 신 [[장비]], 정서장군(征西將軍) 신 [[황충]], 진원장군(鎭遠將軍) 신 [[뇌공]], 양무장군(揚武將軍) 신 [[법정(삼국지)|법정]], 흥업장군(興業將軍) 신 [[이엄]] 등 120명이 삼가 아룁니다. > >옛적 [[요(삼황오제)|요(堯)임금]]은 지극한 [[성인#s-2|성인(聖人)]]이었으나 조정에는 네 명의 흉적[* 사흉(四凶) - 요임금의 적인 공공(共工), 환두(驩兜), 삼묘(三苗), 곤(鯀)을 일컬음. 요임금의 신하이며 훗날 왕이 되는 순(舜)이 사흉을 쳤다.]이 있었고, [[성왕(주)|주성왕]](周成王)[* 주나라 2대 왕인 희송. [[무왕(주)|주무왕]](周武王) 희발의 아들.]은 어질고 현명했으나 네 곳의 나라[* 삼감이 분봉받은 관(管), 채(蔡), 곽(霍) + 무경이 분봉받은 송나라] 가 난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고황후 여씨|고후(高后)]][* [[한고제]]의 아내인 여후(여치)를 말함]가 [[섭정|칭제(稱制)]][* 황제의 직권을 대리로 행사하였음을 뜻한다. 황제를 자칭하는 칭제(稱帝)와는 의미가 다르다. 여러 제도와 관련된 황제의 명령을 제서(制書)라 하며, 여태후는 아들 혜제(惠帝)가 사망한 후 그의 양자가 즉위하자 어리다는 이유로 황제의 권한을 대신 행사하였다.]하자 여(呂)씨들이 천명을 훔치고, [[소제(전한)|효소제]](孝昭帝)[* 전한의 여덟 번째 황제인 소제 유불릉(劉弗陵). 여덟 살에 황위를 이어받자 사방에서 반란이 빈발하였고, 전대 황제인 [[무제(전한)|무제]]로부터 탁고를 받은 [[곽광]]과 상관걸은 서로 원수가 되어 다투었다. 소제가 곽광의 편을 들자 상관걸은 결국 반란을 시도하였지만 사전에 누설되어 삼족이 멸해졌다.]께서 나이 어리시니 상관걸(上官桀)이 역모를 꾀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은총을 빙자하여 나라를 짓밟고 흉악하게 난을 일으켜 사직을 위태롭게 한 자들입니다. [[순(삼황오제)|순(舜)임금]]과 [[문공(주)|주공]](周公), [[유장(전한)|주허후(朱虛侯)]]와 [[곽광|박륙후]](博陸侯)[* 앞서 언급한 ‘사직을 위태롭게 한’ 사건들을 진압한 인물들. 순임금은 요임금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나라를 다스렸다. 주공은 주무왕 희발의 동생으로 조카 주성왕을 보좌하였다. 주허후는 한고제 유방의 손자 유장으로 여태후가 사망한 후 여씨 일족을 주살하고 한문제 유항을 즉위시켰다. 박륙후는 한무제의 탁고를 받은 대신 곽광으로 상관걸을 제거했다.]가 아니었더라면 어찌 이들을 토벌하여 나라를 안정되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 >엎드려 생각하건대, [[헌제|폐하]]께서는 성스러운 덕을 타고나시어 만방(萬邦)을 다스리셨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액운을 만나 이를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동탁]]이 먼저 난을 일으켜 [[낙양|도읍]]을 휩쓸었으며, [[조조]]가 뒤이어 화를 일으켜 천자의 권위를 훔쳤습니다. [[효헌황후 복씨|황후]]와 태자께옵서 짐살(鴆殺)당하셨고[* [[짐새|짐]]([[鴆]])은 고대 중국 남부에 살았다고 하는 전설상의 새로, 단번에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독을 지녔다고 한다. 이 짐새를 이용해 만든 독을 짐독(鴆毒), 짐독을 이용해 사람을 살해하는걸 짐살(鴆殺)이라고 한다.], 천하가 어지럽혀졌으며, 백성들은 크게 상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오래도록 [[몽진]](蒙塵)하시어 재액을 근심하시며 [[허창|텅 빈 도읍]]에 유폐되셨습니다. 사람과 신령이 주인을 찾지 못하게 되었고, 왕명의 드나듦이 가로막혔습니다. 역적이 나라의 법도를 가리고 마침내 신기(神器)[* 신령에게 제사를 지낼 때 쓰는 그릇. 신기를 훔친다는 것은 곧 제위를 찬탈한다는 의미다.]를 도적질하고자 합니다. > >좌장군(左將軍) 영[[사예교위|사례교위]](領司隷校尉) 예형익삼주목(豫荊益三州牧)[* 예주, 형주, 익주 세 개 주의 목을 겸함.] 의성정후(宜城亭侯) 유비는 조정의 벼슬을 받은 몸으로서 힘을 다하며 목숨을 바쳐 국난을 막고자 했습니다. 일찍이 그 조짐을 보고 혁연(赫然)히 분발하여 거기장군 [[동승]]과 더불어 조조를 주살하고자 했습니다. 이로써 나라를 안정시키고 도읍을 안녕케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동승이 일을 꾀함이 치밀하지 못하여 마침내 조조의 악행이 커져 해내(海內)가 모두 쇠망하고 말았습니다. 신(臣) 등은 크게는 염락지화(閻樂之禍)[* 염락(閻樂)이 일으킨 화. 진나라의 환관 [[조고]]는 [[진시황]]이 죽자 2세 황제 [[호해]]를 섬기며 국정을 농단하였다. 이후 호해의 의심을 사게 되자 염락을 시켜 호해를 살해한다.]를 겁내고 작게는 정안지변(定安之變)[* 정안(定安)의 변고. 정안(定安)은 전한의 마지막 황제 [[유자영]]을 뜻한다. 2살에 [[왕망]]에 의해 황제가 되었으며 4살 때 왕망에게 제위를 찬탈당하고 정안공(定安公)에 봉해졌다. 이후 유폐되었다가 17년 만에 한 황실의 후예인 경시제 [[유현]]이 왕망을 멸망시키고 그를 구출한다. 하지만 스스로 황제가 되고 싶었던 유현은 결국 그를 살해했다.]을 염려하며 늘 왕실을 근심하기에 아침저녁으로 두려워하고 떨면서 숨죽이고 있을 따름입니다. > >옛적 우서(虞書)[* [[상서|서경]](書經)의 우서편(虞書篇). 서경은 우서편(요순 시대), 하서(하나라 시대), 상서(상나라 시대), 주서(주나라 시대)로 구분되어 있다.]에서는 돈서구족(敦序九族)[* 구족(九族)의 순서를 정하여 두텁게 대우하였다는 뜻.]이라 일컬었고, 주나라 때는 이전의 두 나라를 거울삼아 [[동성제후|같은 성씨들을 제후로 삼았으니]], 그 뜻이 시경(詩經)에 기록되어 오래도록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또한 한나라가 처음 흥하였을 때도 동생과 아들들에게 강토를 나누어 주어 왕으로 높였습니다. 이것이 여씨 일가의 난을 끝내고 태종(太宗)[* 한나라 문제(文帝)를 뜻함.]의 기업을 이룰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신 등이 살펴보니, 유비는 황실과 가까운 일족이자 울타리처럼 종실을 지키는 후예로서 항상 나라에 뜻을 두고 난을 그치게 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조조를 [[한중 공방전|한중에서 격파하니]] 해내의 뭇 영웅들이 우러르며 앞다투어 귀부하고 있으나, 작위가 충분치 않고 [[구석]](九錫)을 받지 못하였기에 사직을 보호하고 만세에 빛을 밝히기 어렵습니다. > >먼 곳에서 천자의 명을 받들고자 해도 조정의 책명이 단절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나라가 중흥(中興)할 때, 산과 강의 길이 가로막히고 여러 사람들의 지위와 권한이 동일하여 아무도 능히 통솔하지 못하게 되니 결국 하서태수(河西太守) [[양통]] 등이 두융[* 전한 말 후한 초의 사람. [[왕망]]이 세운 [[신나라]]가 망한 후 장액속국도위(張掖屬國都尉)로 있었다. 여러 사람이 천하를 다투는 과도기에 양통 등 여러 사람의 추천을 받아 하서지역 여러 군현의 군사를 관할하였고, 이후 [[광무제]] 유수가 즉위하자 그에 귀순하여 [[후한|한나라]]의 충신이 된다. 광무제의 친정(親征)을 수행하여 옛 주인 외효와 싸워 격파했다.]을 받들어 원수(元帥)로 삼았습니다. 이로 인해 끝내 외효[* 전한 말 후한 초의 사람. 왕망의 관리로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왕망을 상대로 한 거병에 참여했다. 경시제 유현의 수하가 되었다가 다시 반란을 꾀하였으나 실패했고, 고향으로 돌아가 재차 세력을 일으켰다. 이때에 두융도 자신의 세력권 하에 두었다. 이후 광무제와 공손술 사이를 저울질하다 공손술에게 귀부하였고 그 때 두융은 광무제에게 귀순한다. 광무제와 싸우다 병으로 사망한다.]를 격파하고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사직의 어려움이 실로 그 때와 같습니다. 조조가 밖으로는 천하를 집어삼키고 안으로는 뭇 관리들을 해쳐 조정에 위험이 닥쳐왔으니, 마땅히 이 욕됨을 막아내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얼어붙고 말 것입니다. > >그렇기에 신 등이 옛 전례(典例)에 의거하여 유비를 '''한중왕(漢中王)'''에 봉하고 대사마(大司馬)로 삼아 육군(六軍)[* 천자가 이끄는 군대. 주나라 때 임금이 여섯 개의 군대를 이끌었던 데서 유래하였다.]을 이끌고 동맹을 규합하여 흉악한 역적을 멸하고자 합니다. 이에 한중(漢中), 파(巴), 촉(蜀), 광한(廣漢), 건위(犍爲)를 영토로 삼고, 한나라 초기 제후왕의 예에 따라 관청을 두었습니다. 대저 임시방편이라도 진실로 사직에 이롭다면 사사로이 이를 행할 수 있습니다. 공을 세워 큰일을 이룬 연후에는 신 등은 물러나 엎드려 죄를 청하겠사오니, 비록 죽더라도 한이 없겠습니다. * 참고: [[https://pgr21.com/pb/pb.php?id=freedom&no=76372|한중왕표에서 보이는 유비 부하들의 서열]] [[분류:고전문학]][[분류:유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