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일전 (문단 편집) == 설명 == [[파일:attachment/KORvsJPN.jpg]] [[조석(만화가)|조석]]의 축구툰 중 한 컷.[* 왼쪽은 [[박지성]], 오른쪽은 [[혼다 케이스케]]. 혼다 케이스케가 한국에 우호적이고 박지성도 일본에 우호적이나, 그림에도 나와 있듯이 '친선'과 '대혈투'가 공존하는 게 한일전이라 어깨동무를 하면서도 서로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패는 장면으로 묘사했다.] >'''"모든 팀에 다 이겨도 일본에 지면 전패고, 다른 나라에 다 져도 일본에 이기면 전승이다."''' >---- > - [[김응용]].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야구 대표팀]] 감독 시절의 발언.[[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50817009001|기사]] >'''"한일전은 가위바위보도 져선 안 된다잖아요."''' >---- > - [[김원중(아이스하키)|김원중]]. [[삿포로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 일본에 3:0으로 승리한 후 인터뷰에서. 대한민국과 일본의 숙명적인 경쟁 구도의 한일전은 그 어떤 경기보다도 가장 중요한 경기이다. [[대한민국]]이나 [[일본]]이나, 본래의 실력과 상관없이 무조건 승리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다. 몇몇 언론 보도도 이에 동조한다. 전승을 했다가도 이 경기에서 패배하면 비난이 쏟아지며 패배의 원인이 된 선수는 [[역적]], [[매국노]] 취급을 받는다.[* 대표적 사례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의 [[임창용]]과 [[2020 도쿄 올림픽/야구|2020 도쿄 올림픽 야구]]의 [[고우석]].][* 다만 반대로 승리의 주역이 된 선수는 그전까지 부진한 활약을 보이고 있다 해도 한동안 [[까방권]]이 주어지고 평가가 반전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2012년 [[카디프 대첩]]에서 원더골을 넣은 [[박주영]]은 그전까지 와일드카드 값을 못한다고 대차게 까이다 순식간에 여론이 반전되었고, 2019년 동아시안컵 한일전에서 선제 결승골을 넣은 [[황인범]]은 그 전까지 [[FC 코리아]]들에게 타켓이 되어 신명나게 까이다 이 골 하나로 여론이 좋게 바뀌었다.] 거기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면, [[은퇴]]를 선언하거나 (메달이 없어서 예술체육요원이 아닌 경우) [[군대]]로 도망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특히 [[국군체육부대]]에서 하지 않는 비주류 종목이라면 군 입대와 동시에 은퇴해야 한다.] 감독이나 코치, 스태프라도 예외는 아닌데, 패배하면 청문회는 확정이며 수 틀리면 [[경질|곧바로 짐 싸고 나가야]] 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1997년 11월 1일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최종예선 일본전에서 그 전경기까지 5승 1무로 승승장구[* 그 5승 1무에는 [[이민성]]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았고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스포츠의 일본 원정 사상 최고의 유쾌한 순간으로 꼽히는 [[도쿄 대첩(축구)|도쿄 대첩]]이 포함되었다.]하여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0:2로 패하자 이날 [[KBS 뉴스 9]]에서 기자가 '''[[http://mn.kbs.co.kr/mobile/news/view.do?ncd=3779368|"한국 축구 치욕의 날이었습니다."]]'''하고 일갈했다. 또한 이날 [[MBC 뉴스데스크]]에서 [[권재홍]] 앵커는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0533_19482.html|"오늘 하루 종일 온 마음을 잠실벌에 묶어 두었던 온 국민들에게 큰 죄를 진 것입니다."]]'''라며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을 꼬집었다. 가령, 월드컵이나 올림픽과 같은 세계 무대에서 우리가 목표로 한 월드컵 16강 이상이나 올림픽 메달 등을 확보했더라도 그 토너먼트 상대가 한일전이 된다면 관심이 급증한다. 그 대회에서 아무리 좋은 성적이 나온다 하더라도, 한일전에서 패한다면 [[졌잘싸|졌지만 잘싸웠다]]는 말을 듣기 어렵다. 반면, 다른 경기는 부진해도 한일전에서 승리하면 '''"[[EAFF E-1 챔피언십/2017년|그래도 일본은 이겼으니까 됐다]]"'''는 반응을 종종 받는다. 사실 한일전은 당연히 1920~1930년대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경쟁심이 엄청났다. 특히 축구에서는 더더욱 그랬는데 한국인 선수들이 주축인 팀이 일본인이 주축인 팀이랑 맞붙으면 무슨 독립군 전투가 벌어질 지경이었다. 한국 선수들이 일본 선수들에게 거친 플레이를 벌여 일본 선수들이 실려나갈 정도였다.[* 다른 식민지의 경우에도 이와 유사했다. [[인도]]만 해도 [[크리켓]]에서 영국이랑 사생결단 경기를 벌여서 이긴 실화가 인도에서도 영화로 나온 바가 있으며 인도네시아는 지금도 네덜란드와 스포츠 경기를 하면 역시 사생결단으로 경기에 임한다.] 남성잡지 [[맥심(잡지)|맥심]]에서는 스포츠에서 가장 보기 싫은 이벤트로 일본전 패배를 꼽았다. 그래서 '''대표팀은 무조건 일본을 이겨야 한다!'''라고 하지만 실상 한일전에서 대한민국이 지금처럼의 승률을 자랑하는 것도 얼마 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1980년대 후반까지 축구, 농구, 양궁 정도 제외하면 한일전에서의 대한민국의 승률은 높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은 대한민국이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하는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쇼트트랙]]도 1990년대 초반까지는 열세로 밀렸던 적도 있었다. 물론, 반대 케이스로 1990년대까진 일본에게 앞서다가 2000년대에 들어설때쯤 부터 상대전적이 열세로 돌아선 여자배구의 사례도 있지만 드문 편이다. 실제로 1970~1980년대 초중반까지는 한일전보다 남북한의 남북대결 매치가 국민정서상 관심이 많았고 승패에 연연하며 피를 말리게 했던 경기였다. 물론 여기에는 1960~1980년대의 남북한의 라이벌 정서가 심했던 사회적, 시대적 측면이 많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일본도 일본이지만 반공 정서의식이 강한 시대였고 당시엔 경제력 면에서도 비교가 의미가 없을 정도로 일본의 압도적인 우위였기 때문에 한국 입장에선 북한이 더 위협적이었다. 과거 1960년대 북한 축구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에 오르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자 이에 열등의식을 느낀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정부 주도하에 북한만을 꺾기 위해 뛴다는 양지 축구팀을 정보부 산하에 만들 정도였다. 실제로 해당 국가의 종합적인 스포츠 실력 수준이 어디까지 인가를 살펴보는 척도로 대표적인 우리가 잘 아는 올림픽을 꼽을 수 있다. 올림픽에서의 메달 순위와 금, 은, 동메달의 분포도 등을 따져보면 해당 국가의 전체적인 종합 스포츠 실력을 대충 가늠해 볼 수 있는데 과거 일본이 [[6.25 전쟁]] 이후[* 1940년대 초반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었고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에는 추축국이었다는 이유로 일본과 동서독의 스포츠 행사 참여가 제한되었다.] 1960년대([[1964 도쿄 올림픽|1964년도엔 개최국으로서]] 좋은 성적 물론 홈 어드벤티지 감안)와 특히 일본의 버블 경기가 올라가며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시기였던 1970~1980년대에는 일본의 메달순위는 거의 대부분 한국보다 앞서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후 1990년대 들어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버블경제 붕괴 등 국가경제력이 악재를 달리며 스포츠 수준도 그에 비례하여 추락해 올림픽 메달 종합 순위에서 대한민국에 역전당하게 되었다. 실제로 관련 분야(스포츠와 경제)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해당국가의 국력(경제력을 바탕으로 나머지들)과 스포츠 실력은 비례하는 측면이 있다"라고 하는데 그것이 그대로 시기별로 반영된 것이라 보면 되겠다. 물론, 올림픽이라는 여러 종목을 통틀어 종합적인 스포츠 실력이 세부적으로 개별 종목 단위에서 따져본다면 국력에 비례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경제력 = 스포츠성적 이렇게 연계성이 있다는 것이고 무조건 100% 예외가 없다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예를 들자면, 축구에서는 한국보다 경제력이 약한 아프리카권 국가도 상대적으로 부유한 아시아권 국가보다 실력이 좋은 경우가 많다. 그리고, [[마라톤]]에서는 아시아권 국가들보다 아프리카권 국가들이 대체로 좋은 성적을 유지한다. 이러한 분위기를 선수들도 잘 알고 있는 지라, 다른 때 같으면 해외에서 경기를 치르고 귀국할 때 공항에서 평범한 모습으로 기자들을 맞이하지만, 유독 한일전에서 일본에게 지고 돌아오는 경우라면 고개를 푹 숙이고 어두운 얼굴로 기자들을 맞이한다. 양국 사람(네티즌)들 대부분은 막상 한일전이 벌어지기 전에는 '실력도 없고 상대도 안 되는 것들이니까 신경 따위 쓸 필요도 없다.'며 서로 안중에도 없는 척, 쿨한 척을 한다. 하지만 한일전이 시작되면 미친듯이 응원을 하고 패배한 나라의 국민들은 모든 것을 잃은 듯이 허탈감에 빠진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_HVnXDfP-yc)]}}}[br][[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3회에서 묘사한 최초의 한일전 || 역사상 최초의 한일전은 1945년 [[8.15 광복]] 이후, 1954년에 있었던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아시아 예선전이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출정식을 하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일본에게 패하면 고국으로 돌아오지 말고 '''[[대한해협]]에 [[자살|뛰어들어라]]'''."라고 일갈했을 정도로 분위기가 무거웠다. 여하튼 저 대한해협 협박(?)이 대표팀에게 먹혔는지 예선전에서 일본을 상대로 5:1로 압승을 거두게 되고, 이어서 일본에서 또 벌어진 2차전에서는 2:2로 무승부를 이끌어내서 대한민국 최초 월드컵 본선 진출(+아시아 독립국가 최초 본선 진출)의 쾌거를 이뤄낸다.[* 왜 홈 & 어웨이가 아닌 두 경기 모두 어웨이인 일본에서 치렀냐면 역시 이승만이 '''"일본 놈들을 대한민국 땅에 발을 들이게 할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 때문이라기보단 솔직히 조금 쫄렸는데 일본이 안방에서 승리할 경우,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마저도 일본한테 질까봐 출전 자체를 포기하려고 했는데 당시 대한체육회장 [[이기붕]]이 이길 수 있다고 간곡히 설득했고 감독 이유형이 먼저 진다면 안 돌아오고 차라리 현해탄에 빠져 죽겠다고 간청하여 겨우 출전할 수 있었다. [[6.25 전쟁]] 이후 북한과 맞상대는 극력 피하려 했던 모습과 비슷하다.] 해방이 된 지 10년이 되었던 즈음이라 국민들은 승전보에 더욱 기뻐하였는데, 무엇보다도 [[일본]]에 35년간 식민 지배를 당했던 아픈 기억 때문에 경기에서 압승했으며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냈다는 것에 환호를 보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