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일의정서 (문단 편집) == 영향 == 이 의정서가 같은 해 3월 8일자 [[관보]]에 실리자 국민의 비난과 반대가 심했다. 이는 언론을 통하여 공공연하게 정부의 처사를 반대하는 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드디어는 의정서 체결 당사자인 외부 대신 서리 이지용과 동 참사관인 통역 구완희를 [[매국노]]로 규탄, 그들의 집에 폭탄이 던져지는 등의 애국 행동으로까지 전개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토 히로부미]]를 한·일 친선 대사로 파견하여 한·일 친선을 강조하고 무력 시위로 민중 저항을 진정시켰다. 거기에 한국 정부는 이지용을 보빙사로 일본에 파견하여 한·일 친선의 분위기 조성에 보조를 맞추었다. 이후 대한제국은 5월 18일자 조칙으로 한 - 러 간 체결되었던 모든 조약과 러시아인에 양도하였던 이권도 모두 폐기한다고 선언하였다. 사실상 러시아 세력이 한국에서 축출되는 순간인 동시에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종속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러일전쟁은 한반도 북쪽 만주에서 계속 진행된다.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한 상태에서 강압적으로 체결을 요구했고 일본에게 붙은 외부대신 이지용 간에 협정이 체결되었다. [[고종(대한제국)|고종]][* 고종은 해당 의정서의 내용을 마음에 들지 않았다.[[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1&totalCount=21&itemId=jh&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r&searchSubjectClass=&position=10&levelId=jh_022r_0130_049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D%95%9C%EC%9D%BC%EC%9D%98%EC%A0%95%EC%84%9C&searchKeywordConjunction=AND&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D%99%A9%EC%A0%9C&searchKeywordConjunction=AND|#]]에서 보면, 고종은 한일의정서로 인하여 군비가 줄어드는 것을 마음에 들지 않았다.]은 일말의 희망을 가졌는데 당시 한일의정서는 러일 전쟁 극초기에 맺어졌기 때문에, 상황은 러일 전쟁이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면 무효가 되는 것이었다. 만일 당시 대부분의 예상대로 러일 전쟁이 러시아의 승리, 혹은 러시아 우세로라도 끝났으면 한일의정서고 고문이고 뭐고 한방에 다 날아간다.[* 역사상 비슷한 사례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 당시 [[블라디미르 레닌]] 등 볼셰비키 수뇌부, [[부쿠레슈티 조약]]이 체결은 됐지만 승인을 거부한 [[페르디난드 1세]]가 있다. 두 조약 모두 [[동맹국]]이 붕괴하면서 무효가 됐다.] 물론 실제로 조약을 체결했던 이지용처럼 한참 전에 친일로 넘어간 사람도 있다. 일본은 이 의정서를 근거로 한국에서의 군사 활동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게 됐고 여러 이권을 점유하였다. 또한 한국의 통신 기관을 군용으로 접수하고, 경부·경의선 철도 부설권도 일본 군용으로 넘겨 받았다. 6월 4일에는 <한-일 양국인민 어로 구역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여 [[평안도]], [[황해도]], [[충청도]]의 [[서해]]안 어업권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의정서 1조에 근거하여 1904년 8월에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였고 1905년 2월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를 선포하고 [[독도]]를 강제 편입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