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인애국단 (문단 편집) == 활동 == '한 사람을 죽여서 만 사람을 살리는 방법이 혁명수단의 근본'임을 기치로 내건 한인애국단은 소수의 고위층 인사를 암살함으로써 독립을 성취하고자 했다. 첫 타겟은 일본의 [[천황]]. 1931년 12월에 천황을 제거하는 명령을 부여받은 [[이봉창]]이 [[도쿄]]로 파견되었고 이듬해인 1932년 1월 8일 [[쇼와 덴노]]에게 수류탄을 투척한다. 이 사건에서 암살 대상이었던 히로히토는 무사했지만 일본인들에게 '살아있는 신'이자 '국체 그 자체'였던 천황을 향한 암살시도가 있었다는 것은 일본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때 [[중국 국민당]]의 기관지였던 민국일보가 ''''불행히도 실패했다(不幸不中)''''라는 기사를 실으면서 이 문제는 중일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됐고, [[1차 상하이 사변|상하이 사변]]까지 야기한다. 여기에 같은 해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 공원(현재의 루쉰 공원)에서 열린 히로히토 덴노 생일 기념 열병식에서 폭탄을 투척하여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대장, 우에다 겐키치 육군대장,[* [[할힌골 전투]] 당시 관동군 사령관이었으며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다리 한 쪽을 잃었다.] 노무라 기치사부로 해군중장, 시게미쓰 마모루[* 나중에 [[미주리(전함)|미주리 호]]에서 일본측 대변인으로 [[2차 대전]] 항복문서에 서명한 인물이다.] 주중 공사 등 7명을 살상하자 중국 측에서는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4억 중국인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 사람의 조선 청년이 해냈다''''는 중국 총통 [[장제스]]의 유명한 극찬은 덤. 덧붙여서 1920년대 내내 중국 정부로부터 무시에 가까운 푸대접을 받았던 임시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독립군 재건 착수와 같은 사안을 놓고 중국 측의 대대적인 협조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물론 1920년대와 비교해서 대대적이었던 거지, 천조국의 [[무기대여법]] 같은 거랑 비교할 수준은 못되었다. 게다가 [[광복군]] 수립 과정에서도 중국이 사사건건 간섭하는 바람에 갈등이 꽤 격했다.] 이어서 한인애국단은 조선 총독 암살 등을 계획했지만, 한인애국단의 연이은 활동에 일본이 잔뜩 경계수위를 높여서 수포로 돌아간다. 한편 윤봉길 재판 과정에서 김구가 스스로 배후임을 밝힘에 따라 일본 측은 김구와 임정 관련 인물들을 체포하는 데 혈안이 되었고[* 이 시기 김구 목에 걸린 현상금은 오늘날의 [[오사마 빈 라덴]] 수준(...)] 그에 따라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로 옮겨야만 했다. 1933년 김구는 한인 애국단 단원 전부를 돌려보내고 한인 애국단 건물을 폐쇄하며 한인 애국단을 사실상 해산한다, 이 무렵부터는 김구 역시 요인 암살 등의 단발적인 투쟁보다도 군대 양성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구 애국단원 일부를 [[난징]]에 자리잡은 중국 국민당 군사간부학교에 파견하는 등 광복군 건설에 매진한다. 그리고 이 결실이 1940년 창설된 [[한국광복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