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용운 (문단 편집) == 기타 == * 한용운이 생전에 지은 시집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1/24/2008012400082.html|님의 침묵]]'''은 그 불교적인 비유와 상징적 수법으로 지금도 초ㆍ중ㆍ고등학생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다. * [[제자]] 중에는 [[기행]]으로 유명한 [[춘성]] 스님이 있다. * [[동국대학교]]는 1기 [[졸업]]생인 한용운을 높이 기려 만해관, 만해광장, 만해시비 등으로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동국대학교의 전신은 1906년 설립한 명진학교가 기원인데 한용운이 명진학교 출신이다. *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는 한용운의 생가를 복원하고 만해체험관을 건립했다. * [[경기도]] [[광주시]]의 [[남한산성]] 입구에는 만해기념관이 있다. 만해기념관은 한용운을 연구한 전보삼 교수가 모은 한용운의 유품과 관련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 대처승[* [[결혼]]을 하여 가정을 둔 승려를 말한다. [[조선]] 시대 억불 정책 속에 생겨났고 [[일제강점기]] 동안 많이 늘어났다. 현재는 기혼승이라고도 부른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으며 이에 대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요청하는 [[건백서]]를 보내기도 했다. 한용운 본인도 대처승이 되었는데 원래 출가 전에 결혼을 해서 아들 1명(한보국)을 두었다가 [[이혼]]하고 나중에 승려 시절인 1931년에 [[재혼]]하여 외동딸(한영숙)을 보았다. * 첫째 아들인 한보국은 [[신간회]]에서 활동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하다가 [[한국전쟁]] 때 월북했다. 한보국은 북한에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며 그럭저럭 대우를 잘 받았고, 1976년에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 둘째인 한영숙은 아버지의 기념 행사에 가끔 참석하는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대외 활동을 하지 않고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 [[성북동(서울)|성북동]]의 [[심우장]]을 지켰다. 심우장 건너편에 [[일본]] [[대사관]]저가 들어서자 아버지처럼 이를 보지 않으려고 심우장을 떠났다는 야사가 있었으나 한영숙 씨가 [[http://hankookilbo.com/v/df99b2391e6d448fab5f6f020945c90c|부인했다.]] * 한용운의 대처승 인정 요구는 당시에도 파격적인 소수 의견이었고 광복 이후 한국 불교의 주류가 된 [[조계종]]도 대처승을 허용하지 않아 현대에도 소수의 승려만이 결혼을 한다. [[태고종]]이 대처승을 인정하는 대표적인 종파이다. * 한용운은 이른바 근대적 불교를 추구하며 불교의 대중화를 꾀했고 그 과정에서 대처승의 인정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한용운의 근대적 불교 추구는 [[사회진화론]]적 색채가 보인다고 비난받으며 [[불교 사회주의]][* [[캄보디아]] 국왕 [[시아누크]]가 자기의 [[독재]]와 줄타기 [[외교]] 노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창한 동명의 이론과는 다르다.] 등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 이른바 '불교 사회주의'는 말 그대로 불교의 근본 정신이 청빈과 나눔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것으로 [[마르크스주의]]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 한용운이 스님이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인데 [[세계]]를 [[여행]]하며 경험을 쌓고 싶었던 한용운이 배를 타고 가다가[* 이때 당시에 이런 일화도 있었다. 난생 처음 [[백인]]을 본 한용운이 [[러시아인]] 선원을 보고 "여봐라, 이 [[러시아|아라사]] 뱃놈아! 넌 웬 키가 멋대가리없이 크기만 하냐! 그리고 [[눈(신체)/파란색|눈은 또 왜 그런 색깔]]이냐!"하고 외쳤고 이를 뭔 소린지 알아듣지 못하는 선원들이 히죽거렸다고 한다. 당시에도 시비거는 투가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한테 신기하다는 투로 웃으면서 얘기한것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동료 스님들과 같이 있었던 한용운을 한 무리의 조선 청년들이 포위했다. 당시 [[일본 제국|일제]]의 앞잡이나 [[친일파]]들이 스님으로 많이들 [[위장]]했다고 하는데 진짜 스님인 한용운이 엉뚱하게 [[친일]] 밀정으로 몰린 것이다.[* 실제로도 조선 불교계는 일제의 지배에 많이 협조했다.] 맞아죽을 위기에 처한 스님들이 '우린 단지 중일 뿐이다.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청년들은 쉬이 [[의심]]을 풀지 않았고 분위기는 험악해져갔다. 그때 한용운이 "우릴 죽여도 개의치 않겠으나 이국의 바닷물에 던지지 말고 조국 땅에 묻어주시오.'라고 대답하자 그제야 그들이 친일파가 아님을 안 청년들이 사과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 만주로 향하면서 '굴라재'라는 고개를 넘는데 키가 작고 스님이라 머리를 매우 짧게 깎은 그를 주변을 정탐하러 온 [[일본인]]으로 오인한 조선 독립군 후보생 청년들이 한용운을 향해 [[총]]을 쏴서 [[총알]]이 머리에 박혔다. 총격을 당한 한용운이 주저앉자 눈앞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서는 "어서 스스로 생명을 구하려 하지 않고 왜 머뭇거리느냐?"라고 하였고 이에 한용운은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나 달렸다고 한다. [[병원]]에서 [[무마취수술]]을 받으면서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치료]]를 해준 독립운동가 [[김동삼]]은 '활불(살아 있는 [[부처]])'이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나중에 청년들이 병원으로 찾아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자 한용운은 "뭐 그럴 게 있나? 청년들이여, 아무 걱정 마시오. 나는 독립군이 그처럼 용감한 줄은 미처 몰랐구려. 난 이제 마음을 놓았소. 조선의 독립은 그대들 같은 용사들이 있어서 아주 희망적이오."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총격의 [[후유증]]으로 한용운은 한평생 머리를 이유없이 흔들거리는 체머리([[한의학]]에서는 풍두선이라고 칭함) 증상이 생겼으며 [[뼈]] 속까지 박힌 총탄도 다 빼지는 못해 입적할 때까지 그 상태로 살아가야 했다. * 어느 날 한용운이 친일 주지들이 가득 모인 회의장에 우연히 참석하여 [[연설]]을 하게 되었다. 한용운은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주지들은 모르겠다고 했고 한용운은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은 바로 [[똥]]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한용운은 "하지만 똥보다도 더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물었고 주지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한용운은 "그건 [[송장]]입니다. 똥 옆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있어도 썩어가는 송장 옆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송장보다도 더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했다. 흥미가 동한 주지들이 귀를 기울이자 한용운은 단상을 후려치며 벽력같이 외쳤다. '''"바로 여기에 모인 네놈들이다!"''' * 1921년 12월 2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가석방되던 날 한용운 및 그와 함께 출감하는 민족 대표들을 환영하려는 많은 인파가 형무소 대문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한용운은 친일을 하던 사람, 3.1 운동 준비 과정에서 내뺐던 사람들 몇몇의 얼굴을 기억하다가 그들이 군중에 섞여 있는 모습을 보고는 '''"환영 나올 줄은 알면서 왜 자신이 환영받을 일은 하지 못한다는 말인가!"'''라고 쌀쌀맞게 말했다. * 1940년 2월 11일 [[창씨개명]]이 발효된 후 일부 독립운동가들마저 이름을 바꾸고 친일파로 [[전향]]하자 격노한 [[홍명희]]가 한용운을 찾아와서 "이보게, 만해. [[이광수(소설가)|이광수]], [[최린]], [[윤치호]], [[주요한]] 등이 창씨개명을 했다네. 어떻게 이런 개 같은 놈들이 있나?"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자 한용운은 "벽초, 그들은 개같은 놈들이 아니네."라고 말했다. 홍명희가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냐고 따지자 한용운은 "개는 주인을 배반하지 않네. 하지만 이들은 민족과 조국을 배신했으니 '''개만도 못한 놈들이네.''' [[이건 XX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개들이 자네 말을 들었으면 얼마나 섭섭해 하겠나?]]"라고 화답했다. 그러자 홍명희는 "이런, 개에게 큰 실례를 범했구먼."이라고 수긍하고 개에게 사과를 읊조렸다고 한다. * 살아 생전에 [[조선일보]]를 지지했다는 점 때문에 '조선일보의 친일 행각은 조선총독부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대표적인 근거로 거론되기도 한다. 조선일보가 진보 성향이던 1930년대 초 뿐만 아니라 폐간하던 1940년까지 조선일보에 계속 기고했다. 조선일보가 친일 행적을 남긴 1938~1940년에도 조선일보에 계속 기고한 사실을 보면 한용운은 조선일보가 친일 매국 신문으로 변절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2/04/2010020401738.html|#]] * 일례로 변절한 친일파 [[최남선]]이 한용운과 가까운 사이임을 자처하자 한용운은 최남선의 [[장례]]를 치르고자 하였고 후에 최남선이 찾아오자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선생님, 접니다. 육당(최남선의 호)이 왔습니다." >"육당이 누구요?" >"아니? 선생님, 이 육당을 벌써 잊어버리셨습니까?" >"내가 알던 육당은 벌써 뒈져서 장례를 치렀소." 선생의 냉대에 최남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가 최남선-정인보, 이광수-홍명희에게도 있다. * [[3.1 운동]] 때 [[김윤식(조선)|김윤식]]이 독립청원서 사건으로 작위를 박탈당한 얼마 뒤에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우연의 일치[* 1919년 암리차르 [[학살]] 사건 발생에 대한 항의였다.]로 [[노벨 문학상]]으로 받은 기사 작위를 반납하게 된 사건이 벌어지자 한용운은 [[인도]]에도 김윤식 같은 사람이 있었다고 칭찬하는 듯 까는 듯하는 말을 했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사실 만해 선생의 시는 타고르의 영향을 받았고 "타고르의 시(詩) Gardenisto를 읽고"라는 제목의 시를 쓴 적도 있다.[* 이를 보아 한용운이 타고르의 시를 [[에스페란토]] 번역본으로 접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그가 직접 에스페란토를 배워서 독해했는지, 원전을 에스페란토로 접하고서 조선어 번역본으로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 하루는 변절한 [[최린]]이 딸에게 [[용돈]]을 쥐여주자 격노하면서 "더러운 돈이다"라는 말과 함께 돈을 빼앗아 최린의 [[얼굴]]에 던져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 <님의 침묵>을 비롯해 지은 대부분의 시들은 대단히 [[여성]]적인 어조로 쓰였지만 한용운 본인은 호방한 사람이었다. <님의 침묵> 서문에서도 이를 잘 확인할 수 있다. *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해서 [[중추원(대한제국)|중추원]]과 [[통감부]]에 승려의 대처 문제와 관련하여 '헌의서'와 '건백서'를 보냈다. 건백은 정부나 임금에게 자신의 뜻을 올린다는 뜻이다. 그 글에서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殿'이라는 경칭을 사용했고 조선 [[왕조]]를 전 한국(前韓國)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1937년 '지나사변과 불교'라는 글에서 [[중일전쟁]]을 옹호하고 총후국민의 의무를 강조하는 글을 썼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일제의 통감부에 건백서를 올린 것은 당시에는 불교 [[개혁]]이 절실했고 개혁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정치]]의 힘을 빌리려 했던 것이다. 또한 건백서 제출만으로 만해를 [[친일]]로 볼 수는 없다. 그뿐만 아니라 '지나사변과 불교' 글은 만해의 글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글은 당시 불교지 편집장이였던 [[이종욱(정치인)|이종욱]][* [[일제강점기]]의 불교 승려이며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과 [[동국대학교]] 이사장도 지냈다. 초년에는 항일 운동을 했지만 나중에는 일제에 협조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이 쓴 것임을 전 <만해전집> 편집자였던 [[최범술]] 씨가 확인했다고 한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9112000329205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9-11-20&officeId=00032&pageNo=5&printNo=10505&publishType=00020|참조 기사]] * 같은 [[민족]] 대표였지만 1930년대 이후 [[자치론]], 1940년대에는 친일이라는 전형적인 [[변절]] 루트를 밟은 [[박희도(1889)|박희도]]와의 재미있는 비교가 [[천도교]] 계열인 개벽사의 잡지 《제일선》 1932년 7월호에 ‘대경실색, 가장행렬화보’라는 제목으로 합성 [[사진]]과 함께 실렸다.[* 웃긴 것은 박희도의 [[묘]]가 한용운 선생 묘로부터 관리사무소 쪽으로 내려오면 있다는 것이다.] [[파일:/image/shindonga/2008/08/25/200808010500005_2.jpg]] >(5) 誘之不動(유지부동) 한용운 씨: 사진을 자세히 보십시오. >女: 키-스를 해주어요. >한: 웨! 점잔치 못하게 이러시오. >女: 점잔이 다 무어 말너(말라)비트러진 거야! 엉 어서 키-스 해주어… 응. >이와가티(이와 같이) 섹씨(색시)가 조르나 한용운 씨는 그래도 끔적(꿈적)아니하고잇습니다. >이 사진이 ‘카메라’놈의 작난(장난)이 아니고 사실 이러한 경우를 우리 한씨가 당한다면? [[파일:/image/shindonga/2008/08/25/200808010500005_5.jpg]] >(6) 곱사춤의 명인 박희도 씨: 박희도씨가 곱사춤으로 당대의 명인이(아니)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입니다. >이것을 분개한 박씨는 이삼일전에 불국 파리를 건너가 그곳에 유명한 땐서와 이와가티 곱사춤을 추는 광경을 텔레비존으로 본사에 피송하야 독자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햇습니다. >‘카메라’놈도 행셋머리가 고약해!’ * 만해 [[문학]]의 특징은 [[불교]] 사상과 [[독립]] 사상이 예술적으로 결합된 사상시(思想詩)라는 점이다. 사상시는 종교적 신념, 정신적 가치관, 이념 등을 시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자유와 평등 사상, 민족 사상과 민중 사상으로 요약되는 만해의 불교적 세계 인식과 독립 사상은 만해 문학의 핵심으로 만해 문학은 불교 사상, 독립 사상, 문학 사상이 삼위일체를 이루고있다. * 1925년 [[설악산]] 백담사에서 창작하고 1926년 서울 회동서관에서 간행된 시집 『님의 침묵』은 전편이 '이별 - 갈등 - 희망 - 만남'이라는 구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소멸[正] - 갈등[反] - 생성[合]'이라는 변증법적 지양을 목표로 하는 극복과 생성의 시편들이라 할 수 있다. 님을 이별한 시대인 [[일제강점기]]는 바로 침묵의 시대이자 상실의 시대인 것이며 언젠가 맞이하게 되는 만남의 시간은 회복의 시대이자 [[광복]]의 시대로 만해의 시는 빼앗긴 조국을 되찾고자 하는 광복의 시이자 저항시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님의 침묵』에는 여러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가 자연스럽게 사용되어 지는 것이 특징인데 이러한 향토적 정감의 방언 및 토속어 사용과 [[서민]]적인 시어의 활용은 만해의 민중 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시에서 나타나는 [[여성]]적인 어조는 한국 시가의 전통에서 연원한 것으로 잃어버린 조국과 민족에 대한 회복의 소망을 역설화한 여성주의적 방법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만해 시의 탁월한 은유와 역설은 한국의 전통시를 계승한 것으로 만해의 시는 민족 주체성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민족시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 동시대의 고승인 [[만공]]과 절친한 사이였다. 사적으로 독립 자금을 한용운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지금 온 조선 땅에 사람이 하나 하고도 반 있는데 그 하나가 바로 만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 남한에 남은 유일한 혈육인 딸 한영숙 씨의 증언에 의하면 한용운의 독립의지, 독립운동의 어려움을 강조하느라 터무니 없이 날조된 이야기가 매우 많다고 한다. 수십년간 하도 시달리고, 몇 번이나 아니라고 해도 듣질 않아서 지긋지긋 하다는 소회를 밝혔다. [[일본 제국|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으로 심우장을 북향으로 지었다는 설은 남향이면 총독부를 바라보게 될 터이니 차라리 좀 볕이 덜 들고 여름에 좀 덥더라도 북향하는 게 낫겠다며 주춧돌을 돌려 북향으로 지었다는 일화인데 '''심우장은 물론 그 주변 집들 모두 북향이다. 왜냐면 그냥 터가 안좋았던 건데 와전된 것이었다.''' '''아래 근거기사 링크.'''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202261185349070]] [[http://www.h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0954]] ''''''그러나 최근 2022년 6월 13일 선학원 주최 '만해 한용운 스님 78주기 추모 학술제'에선 "'조선총독부가 마주보기 싫어 심우장을 북향으로 지었다는 설'에 대해 한영숙 여사도 총독부가 보기 싫어서 북향으로 지은 것이라는 확인을 받았다"고 한다.[[https://youtu.be/AXdoh2Q-aeE?t=390|#(6분 33초부터)]]''''''[* 확인했다는 주장, 현재 출처 확인 안됨.][* 다만 일본에 대한 적대감만은 분명해 글자조차도 싫어했는데 그 일화로 어느 날 한용운이 신문을 보던 중 [[가나 문자]]가 나와서 딸이 "아버지, 이 글자는 무슨 글자에요?"라고 물으니 한용운 왈, "그건 글자도 아니다. 몰라도 된다"라고 했다고 한 일화가 전해진다.] * 한용운은 게장을 좋아해서 김치와 함께 늘 밥상에 올라왔으며 이따금 생선토막이 올라왔다고 한다. 또 술을 무척 즐겨서 아내가 늘 술을 담가놓았다고 한다. 술과 짠 음식을 즐긴 탓에 한용운은 말년에 고혈압이 생겼는데 추운 날 밖에서 눈을 쓸다 혈압이 도져 풍이 와 쓰러지면서 급격히 쇠약해졌다. * 젊은 시절 이광수가 그의 집인 심우장을 방문하자 그의 행동을 잠시 관찰하더니 "네놈은 [[나라]]를 [[배신]]할 인물이니 다시는 내 앞에 오지 마라!"하고 일갈하면서 내쫓았다는 설이 있었는데 이것은 당연히 허구다. 이광수는 1892년생이고 한용운이 심우장에 기거한게 1933년부터니 젊은 이광수와 심우장에서 만날 수도 없었고 두 사람은 심우장에 터잡기 한참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이광수가 상해에서의 궁핍한 생활과 임정내 파벌싸움에 진력이 나서 귀국할 무렵 한용운은 3.1운동 참여로 3년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던 참이었다. 출소한 한용운은 1922~23년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 운동에 참여했고 이때 이광수와 면을 트고 교류했다. 이광수가 친일로 기운 건 수양동우회 사건이 벌어진 1938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