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석규 (문단 편집) === 2000년대 중, 후반 슬럼프 === 3년 간의 공백 끝에 2002년 영화 [[이중간첩(영화)|이중간첩]]으로 복귀한다. 사실상 한석규라는 이름은 흥행불패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에 굉장한 주목을 받았지만... 한석규는 배우 데뷔 이래 최초로 쓰라린 실패를 맛보게 된다. 69억이라는 제작비가 들었으나 흥행 기록은 서울 361,580명 전국 1,025,928명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사실 영화 자체의 완성도가 형편없는 것은 아니라서 차후 어느 정도 재평가되긴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상대 여배우인 [[고소영]]의 [[연기력]]이 해도 해도 너무할 정도로 부족했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아무리 발연기한다고 욕먹는 배우들도 연기 연습만큼은 어떻게든 단단하 시키고 나오는 시대인지라, 연기력이 부족하다고는 느낄 수 있어도 아주 수준 이하라고 느끼는 경우는 드문데 이 작품에서 고소영이 한 연기는 2010년대에 본다면 정말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형편없었다. 여주인공이라는 사람의 연기가 극악한 수준이니 영화가 잘 되는 것을 바라는 것도 욕심이었을 듯. 흥미로운 인터뷰, 이중간첩 복귀 전 공백 기간 동안 한 기자는 왜 공백기를 가졌냐고 묻자, 지금은 한국영화의 거대한 거품이 낀 시기고 이 거품이 다 빠져나간 후에서나 진짜 작품 활동을 해야 할 것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2001년 ~ 2003년은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어 가는 감독, 작품, 배우들이 봇물 터지듯이 터져나온 시기였다(…). 특히 2003년은 [[박찬욱]]의 [[올드보이(2003)|올드보이]],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김지운]]의 [[장화, 홍련]]이 한꺼번에 출현했던 한국 영화 사상 최고의 황금기였다. 그리고 2014년 12월 손석희 사장과의 인터뷰에서는 부흥기였지만 거품이 굉장히 많은 시기였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하지만 영 틀린 말도 아닌 것이 봉준호, 박찬욱을 위시한 몇몇 한국 영화계의 대표적인 거장들과 많은 걸작들이 탄생한 시기였지만 사실 2000년대 초반은 이 감독들의 전성기가 아니라 그들이 그제서야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시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한국 영화의 명작들 중에서는 정작 개봉 당시에는 그저 그런 흥행과 평가를 받았다가 훗날 재평가된, 시대를 앞서간 작품들도 있다. 다시 말해 당시만 해도 그들의 존재는 한국 영화계에서 지극히 일부였고 오히려 메인스트림에서는 오직 수익만 노리는 개그 + 신파 + 조폭이라는 코드로 묶을 수 있는 2000년대 초중반의 B급 이하의 영화들이 무더기로 양산된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조폭 영화 중에서 흥행과 더불어 평가까지 좋았던 작품은 지금도 한국 조폭 영화의 본좌급으로 꼽히는 [[곽경택]] 감독의 [[친구(영화)]]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의 대박 흥행 때문에 조폭미화물 양산이 가속화되었다. 그나마 두사부일체, 신라의 달밤, 조폭 마누라 등은 어느 정도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두사부일체와 조폭 마누라, 가문의 영광 등은 시리즈화되면서 퇴화됐다.] 개그+조폭+신파라는 장르마저 새로 만들어도 될 정도로 영화들이 양산되었고 이런 작품의 주연들이 온갖 예능에 출연해서 개봉 1~2주간 후딱 벌어먹고 빠지는 식의 쓰레기스러운 현상이 지속되었던 시기였다. 특히 상술한 명작들도 많았지만, 망작의 대명사인 [[긴급조치 19호]],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주글래 살래]], [[클레멘타인(영화)|클레멘타인]] 모두가 한석규의 휴식기 ~ 복귀 시점인 2002년 ~ 2004년에 나온 작품이다.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현재 2010년대에도 이러한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는게 문제.[* 아이러니한 점은 이런 B급 조폭코미디 장르 영화들의 원류와도 같은 작품이 바로 한석규 주연의 [[넘버 3]]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은 조폭을 희화화하긴 했지만 미화는 절대 하지 않은 [[블랙 코미디]]이고,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인정받은 수작이지만 넘버 3의 성공 이후 겉모습만 어설프게 베껴다가 조폭 미화까지 얼치기로 곁들인 채 내놓은 수준 이하의 양산형 영화들이 넘쳐나면서 영화계에 거품이 끼게 된 것이다.] 여튼 한석규는 결국 2003년 프리미어에 [[손예진]]과 함께 과대평가된 배우에 선정되는 불명예를 안는다.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112&aid=0000001077|#]][* 그 이전 2001년도에 조사한 설문에서도 한석규가 과대평가받은 배우 상위권으로 뽑혔으며 기자들끼리 선정한 최악의 배우 순위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했다. 참고로 이 분야 1위는 같은 영화에 출연했던 [[신현준]]. '최고의 배우' 1위는 바로 [[최민식]].] 아이러니하게도 1996년 6월 프리미어에서 선정한 한국 배우 평가에서는 한석규가 당시 최고의 배우로 평가를 받았던 [[안성기]], [[박중훈]], [[문성근]], [[이경영(1960)|이경영]]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이후 형과는 결별했는지 과작(寡作)의 대표적인 배우였던 한석규는 다작(多作) 배우로 거듭나게 된다. 2004년에는 스릴러 영화 [[주홍글씨]], 2005년에는 정치 블랙 코미디 작품인 [[그때 그 사람들]]에 출연한다. 주홍글씨의 경우 첫 주에 흥행 1위를 기록하는데 초반의 흥행을 이어나가지 못하면서 하락세가 대폭 심해졌고, 영화 역시 흥미진진한 초반과는 다르게 후반으로 갈수록 뚝뚝 끊기면서 작품성이나 흥행이나 용두사미적인 작품으로 끝났다. 서울 489,254명, 전국 1,437,549명으로 겨우 손익분기점은 넘긴 수준. 한 때의 흥행의 제왕이었던 한석규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사실상 대중들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흥행 실패에 가까웠다. 이런 이유로 주홍글씨 개봉시기에 평론가 하재봉은 '''이제 한석규의 시대는 갔다. 그는 한물 간 배우가 되었다'''고 대놓고 깠다. [[그때 그 사람들]]은 좋은 소재를 제대로 끌고 나가지 못한 면이 있었고[* 이 점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데 정통 역사극이라기보다는 블랙코미디 풍자극이자 미시사를 다룬 작품이었고 이 측면에서 훌륭한 성과를 이뤄냈다. 한 유명 평론가는 이 작품을 걸작이자 임상수 감독의 최고작이라 칭했다. 한석규의 연기도 훌륭했고.] 서울 338,025명, 전국 1,083,962명(제작비 60억)을 동원하는 데 그치면서 두번째 영화 실패작으로 남게 된다. 3년이 공백의 무색하도록 2005년에는 또 다른 작품에 출연했는데 초심을 찾기 위한 것인지 안전해보여서 택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닥터 봉 이후 10년만에 코미디 영화 '미스터 주부퀴즈왕'에 출연했다. 하지만 배급사에서도 버린 카드라고 생각했던지 제대로 홍보도 안 되었고[* 이 영화의 배급사는 '쇼박스'다. 추석연휴에 개봉시킬 영화로 '미스터 주부 퀴즈왕'과 '가문의 위기'를 선정하여 두 편 모두 개봉시키려고 했으나, 시사회 결과 '가문의 위기'가 흥행력이 좋다는 평가를 받아, '미스터 주부 퀴즈왕'은 '가문의 위기' 상영이 끝나면 바로 개봉시키려고 했었다. 그러나 의외로 '가문의 위기'가 흥행 대박을 터트리고 쇼박스에서도 장기간 쭉 밀어주면서 사실상 '미스터 주부퀴즈왕'은 찬밥신세가 되었다.] 개봉 얼마 후에 케이블에서 볼 수 있었다. 서울과 전국 합해 50만 명도 기록 못한 처참한 실패작. 복귀 이후 세 작품을 실패했지만, 그래도 한석규라는 이름에 기대를 많이 했는지 절치부심하는 심정으로 도전했는지 2006년에는 세 작품에 연달아 출연한다. 그것도 단독주연이 아닌 공동주연으로.. 영화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스캔들]]의 시나리오를 집필했던 김대우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음란서생'은 서울 868,692명, 전국 2,576,022명을 동원했으며, 관객들로부터 작품성 역시 인정받았다. 이로써 그도 침체기에서 벗어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다음 작품인 영화 [[구타유발자들]]은 서울과 전국 관객 합쳐 20만 명도 기록하지 못하여 역대 한석규 출연작들 중 최저의 흥행스코어를 기록한 영화로 남게 되었다.[* 제작비가 21억.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영화의 99%가 계곡에서 진행되고 기껏해야 오토바이 5~6대, 자동차 1대가 끝인데 어디에 돈이 들어갔는지. 21억이나 쓸 이유가 있나. --배우들도 개런티를 대폭 낮췄다던데 말이다.-- 그 자동차 1대가 벤츠였다.] 그러나 구타유발자들은 상영한지 10여년이 넘었어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숨겨진 명작으로 회자되고 있다. 다만 구타유발자들의 경우 영화를 실제 보면 알겠지만 포스터에 한석규가 나올 뿐 실제 한석규는 특별출연에 가까운 느낌이다.[* 물론 영화 흐름상의 비중은 높지만 결국 화면에 나오는 분량으로는 분명 특별출연이다.] 원래 제안받은 역할은 [[이문식]]이 맡았던 봉연 역할이었지만 시나리오를 곰곰히 검토한 한석규는 문재 역할이 자신에게 어울릴 것이라 생각하고 역으로 제안한다. 다만 한석규 외의 다른 출연배우들의 이름값이 조연에 불과했던 이문식이나 당시에는 올드보이의 감옥사장 정도로나 기억되던 [[오달수]]나 신인이었던 차예련, 김시후 등이었기 때문에 크레딧이나 포스터에 얼굴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영화 전체의 흐름을 보면 초반과 막판을 제외하고는 한석규는 얼굴조차 안 비친다. 그런 영향이 흥행에 영향을 준 것도 적지 않다. 그 해 가을 개봉한 8년만의 멜로작품인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은 현실적이고 공감이 간다는 평과 지나치게 밋밋했다는 평 두 가지가 크게 갈리는 작품이었고, 흥행에 실패했다. 2006년에 세 작품이나 출연하며 다작을 했던 한석규는 2007년에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2008년 영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컴백했다. 당초 감독을 맡기로 했던 안권태 감독이 촬영 중반 [[곽경택]] 감독으로 교체되면서 대본이 수정되었고, 비중 문제로 안 좋은 말이 나왔던 작품으로 촬영 자체가 험난한 작품이었다. 더구나 같이 개봉했던 작품이 [[다크 나이트]],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미이라 3: 황제의 무덤]]으로 상당히 불리한 게임이었다. 하지만 그 틈바구니 속에서도 나름 선전, 26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고, 손익분기점도 간신히 넘기고 그나마 중박은 쳤다. 2009년에는 주연으로 영화 [[백야행]]에 출연한다. 원작소설도 3권씩이나 되고,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로 나왔어야 할 분량을 2시간 짜리로 압축했으니. --작품 완성도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2010년, 한석규는 코미디 영화인 [[이층의 악당]]을 통해 다시 도전했다. 특히 닥터봉을 통해 서로에게 윈윈이었던 [[김혜수]]와의 합작이어서 많이 기대했고 그 전과는 달리 이번엔 2005년 '달콤 살벌한 연인'으로 흥행과 비평 모두 성공한 손재곤 감독과의 작품이었는데 촬영 전부터 좋은 시나리오라며 호평을 들었고 또 평론가들 역시 호평을 아끼지 않으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기대도 컸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함께 개봉한 외국영화 홍보사 알바들의 공격과 [[연평도 포격 사태]]로 인해 나라 분위기가 다운되어 개봉시기를 잘못 잡은 게 주 원인이었고, 영화 데뷔작 '닥터봉'을 기억하는 지금의 영화관객들이 많지 않은데(그것도 [[1995년]] 개봉작인데..), '닥터봉'의 커플이었다고 병맛 홍보로 밀어부친 것도 실패의 원인이었다. 닥터봉이 흥행했던 시장은 한국영화의 파이가 2010년의 10분의 1도 되지 않을 시점이었으니 흥행했다 한들 널리 알려졌다고 보긴 어려웠다. 2010년대 주요 영화관람 연령층이 2,30대인데 닥터봉 개봉당시엔 어린아이었으니 알 리가 있나.] 한석규는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위상이 확연히 다르다. 이렇게 몰락하게 된 이유는 4년간의 공백으로 한석규의 역할을 대신 할 배우들인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 황정민 등이 급성장했고, 한석규 역시 2000년대 선택한 작품들이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이며 많이 밀리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선구안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사실 선구안도 문제지만 한석규 외에 떠오르는 라이징 스타들이 많이 생겨났고, 굳이 그 개런티 줘가면서 한석규를 쓸 이유가 없으니 21세기 들어서는 시나리오가 애초에 잘 안 가게 되었다.[* 흥행 실패를 여러 번 겪었다고 하더라도 90년대의 최고 영화배우이자 연기력 및 캐릭터 분석등으로는 당대의 배우임에 분명하고 경력 또한 적지 않아 개런티를 낮게 받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한석규의 부진에 대해 너무 검증되지 않은 신인감독과 작품을 한다는 것을 원인으로 꼽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어느 정도 타당한 이야기. 대부분의 흥행배우들을 보면 감독과 배우들이 인맥으로 같이 가는 경우가 많은데, 한석규의 경우 신인감독과의 작품을 고집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박찬욱]], [[김지운]], [[이창동]], [[봉준호]] 감독 등 검증된 감독과 작품을 하는 최민식, 송강호라든지, [[강우석]], [[윤제균]] 감독 및 그 연출부 출신들과 작업을 하는 [[설경구]]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한석규의 경우 데뷔작을 같이 했던 이광훈 감독은 닥터 봉 이후 패자부활전, 자귀모, 천년호라는 영화 팬들은 알만한 최악의 작품을 연속으로 연출하며 2003년을 끝으로 영화계에서 자취를 감췄고 현재 뉴욕에 거주중이다. 그리고 은행나무 침대와 쉬리를 같이했던 강제규는 현재 제작에만 전념하며 가뭄에 콩 나듯 연출하다가 [[마이웨이]]의 실패와 한중합작영화 제작 실패 등등의 악운이 겹쳤으나 다시 영화연출을 하게 되었다. 한편 초록물고기의 이창동 감독과 8월의 크리스마스의 허진호 감독은 활발하게 작업을 하는 감독이 아니고 접속과 텔 미 썸딩을 같이 했던 [[장윤현]] 감독은 그 후 썸, 황진이, 가비가 연속으로 실패해버렸다. 거기에 넘버 3의 송능한 감독은 아예 영화계를 떠났다. 즉, 8편 연속 흥행으로 1990년대 전성기를 가져다 준 감독 중 현재에도 활발하게 작업을 하고 있는 감독들이 거의 없는 게 사실이다. 이처럼 2002년까지 티켓파워 1위를 기록했던 그가 2000년대 침체기 이후에는 언론에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으며, 가끔 하는 설문조사 순위권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