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석규 (문단 편집) === 하락세 === 한석규가 한때 하락세를 겪었던 원인은, 본인의 행실이 나빴거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이 아니었다. 충무로 진출 이후 단 한 번도 실패작에 출연하지 않았고, 비평에서도 실패한 작품[* 닥터봉은 예외로 작품성보다는 배우에게 호평이 쏠린 작품이다. 초록물고기는 흥행에 실패했다는 사람들이 많지만, 당시 단관개봉 시스템이었던 서울에서 20만명에 가까운 흥행스코어를 기록했다.]이 거의 없다시피 하여 1990년대 중, 후반은 독보적인 원탑이었다. 1997년 ~ 1999년 [[씨네21]]에서 조사한 '충무로 파워 50인'에서도 한석규는 최소 10위권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최고 순위는 1998년에 조사한 2위. 웬만한 유명 제작자와 감독도 한석규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로 그가 영화계에 끼친 영향력은 2000년대 배우들 중에서도 전무후무할 정도였다. 이 때 대한민국의 모든 시나리오의 99%가 한석규에게 맨 먼저 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 시기 왕성한 활동을 했던 탑배우들보다 한석규에게 먼저 시나리오가 갔고, 그가 거절하면 다음 순서로 다른 배우들이 받아 보는 경향이 업계에서도 당연시 여겨졌다.[* 당연히 다른 배우들에게는 전혀 유쾌한 현상이 아니었기에, 당시에도 "한석규의 티켓파워는 인정하지만 같은 배우로서 참 서글프더라"는 불만이 많았다는 후일담도 전해진다.] 물론 배우가 시나리오를 선별하는 능력은 중요하지만, 그 까다로움이 너무 지나친 것은 문제였다. 거기다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리고 CF에 전념하는 모습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게 되자 "8월의 크리스마스"가 개봉하는 1998년부터 한석규 자체를 고깝게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그의 사소한 행동마저 조금씩 구설수에 오르게 되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당시 매니저를 맡은 친형 한선규 때문이었는데, 한석규에게 들어오는 시나리오를 1차 검토하는 역할도 맡았다.[* 이 당시 한석규가 시나리오 보는 눈이 탁월하다는 평도 많은데, 사실 이것도 형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2000년 들어 한석규 본인이 고른 영화들 중 흥행과 작품성에서 어긋나는 작품이 좀 있다.] 그렇게 시나리오를 판단하는 역할만 했으면 좋으련만, 본인의 능력을 넘어선 영화 제작에까지 관여하다 보니 정작 한석규 본인이 하고 싶었던 작품은 시나리오 선별 작업에서 퇴짜를 놓거나[* 그래서 좋은 작품들을 다른 배우들에게 빼앗겨 버려서 한동안 형과 많이 싸우기도 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작품이 1996년에 개봉한 '악어'와 '채널69', 그리고 2000년에 개봉한 '''[[박하사탕(영화)|박하사탕]]'''.][* 참고로 1997년에 개봉했던 영화 '인샬라'의 주인공으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었다. 이 영화의 제작자인 이승재 대표와는 '은행나무 침대'로 인연을 맺어 이승재 대표가 점찍었기도 했었으나, 형 한선규가 상대 여배우 캐스팅 및 제작에도 간섭을 하는 바람에 제작진 내에서 불만이 표출되고, 결국 최종 캐스팅에서 탈락되었다. 결국 차기 후보였던 [[최민수]]가 낙점. 이 외에도 한선규의 만행이 연예계에서도 많은 소문을 불러 일으켰으나, 결과적으로는 한석규가 너무 잘 나가버리는 바람에 수면 위로 올라오진 못했다.] 충무로 입성 초기 [[닥터봉]]이 크게 성공하여 수많은 시나리오가 들어올 무렵에는 사전에 한석규와 상의 없이 무조건 출연한다고 했다가 나중에 출연 번복을 하거나 개런티가 적다며 퇴짜를 놓기도 했다. 이 당시 발매된 영화잡지와 각종 신문들에 실린 한석규 관련 기사들의 제목은 죄다 "어느 영화에 출연 확정" 이런 식이었다. 한석규에 대한 기자들의 평이 안 좋게 나온 시기가 1996년 무렵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심지어 그 동안 한석규가 벌어 준 돈 수십억 원으로 영화사를 차려서 제작까지 했으나 손익분기를 못 넘겨서 손실도 많았다.[* 2001년 제노사이드와 2004년 소금인형.] 1990년대 후반 영화잡지 월간 [[스크린]]에서 주최한 핸드프린팅 행사 제의도 단칼에 거절하는 등[* 처음엔 한석규가 '형과 상의해서 제게 말씀해 주세요'라고 해서 형 한선규에게 제의했더니 '이런 건 [[박신양]] 같은 애들이나 해야 한다'며 타 배우 간접비하는 물론 실명 거론까지 하는 통에 안 좋은 소문이 퍼졌고, 그 때문에 발언 당사자도 아닌 한석규가 억울하게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른 적도 있었다. 참고로 박신양은 이 당시에도 톱스타 취급을 받던 배우였다. 해당 기사는 실제로 1999년도 영화잡지 '스크린'에 게재되기도 했다.] 오지라퍼 행동으로 한석규를 기피하는 제작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동안 한석규의 공백기가 길어지면서 하락세가 되자, 빛을 못 보던 다른 배우들의 도약이 조금씩 시작되었다. 그 결과 굳이 한석규가 아니더라도 연기나 흥행 면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만한 배우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 [[김윤석]], [[황정민]], [[이병헌]] 등등으로 거론할 수 있다.] 한석규로서는 조금씩 설 자리를 잃게 된 셈이다. 다만 훗날의 한선규의 인터뷰를 들어본다면, 단순히 한선규가 혈연으로 한석규의 매니저를 맡아서 말아먹었다기엔 나름대로의 고충도 심했던듯 하다. 이미 드라마로도 커리어를 나타냈고, 닥터봉, 은행나무 침대를 이어 [[초록물고기]]에 캐스팅될때도 매니지를 하는 [[송강호]]를 추천해줘서 그의 커리어를 이어나갔고, 나름대로 소속 배우 관리도 잘했으나, 충무로 내에서는 이때까지도 '''"한석규가 영화 몇편 찍었다고 무슨 배우냐? 쟤는 탤런트지."'''라고 영화판에서 은근히 깔보는[* 당시에는 희극배우는 코미디언, 드라마 배우는 탤런트이고 오직 영화배우만 배우 타이틀을 사용해야한다는 문화가 아주 심했고, [[배우병]]항목을 보면 알듯이 아직도 영화배우와 드라마배우 사이에 급을 나누는 영화인들은 많은 편이다.]상황도 많이 겪었다고 한다. 작품을 흥행시키며 몸값이 올라가자 역으로 갑질하던 영화제작사들 속에서 을질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한석규의 계약에서 [[쉬리]]의 러닝개런티 역시도 한선규의 아이디어여서 수많은 돈을 받았다는 것을 들어보면, 마냥 형때문에 커리어가 망가졌다고는 보기 힘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